월드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동남아시아 회교국들의 21세기 전략

(사진/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세워진 횃불 모나스. 인도네시아의 번영과 통일성을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이다.)

아주 먼 옛날 선지자 무하마드는 황량한 사막에서 알라의 말씀을 듣고 다 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참되고 믿을 만한 ‘상인’은 부활의 날 에 예언자와 순교자,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기업 활동에 무슬림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증권시장이나 금융시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수고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금리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슬람 교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아시아 재계의 새로운 리더로 등장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기업활동을 하는 것은 단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이다. 말레이시아 인구의 70%와 인도네시아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들은 어느 때보다 자기 목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정부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제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수십억달러씩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다.

동남아시아를 거미줄처럼 엮고 있는 말레이시아항공의 회장 겸 경영책임 자인 람리는 대표적인 무슬림 사업가이며 위성을 소유하고 있는 통신사 소유주이기도 하다. 그는 말레이시아 사상 가장 커다란 매수·합병을 통 해 이 국적 항공사를 인수했다. 람리처럼 도전적인 무슬림 기업인들이 급 속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 최근 동남아시아 재계의 새로운 현상이다.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명물이 된 페트로나스(말레이시아국영석유공사)의 쌍둥이빌딩 역시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의 자랑거리다. 지하 6층, 지상 92 층에 지상 452ｍ.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알려진 미국 시카고의 시 어스타워(443ｍ)보다도 높다. 마치 거대한 모스크(이슬람 성당)를 연상하 게 하는 이 건물은 알라에게 좀더 다가서려는 말레이시아인들의 갈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당당하다.

사실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이 경제적으로 소외된 데는 부를 축적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이슬람 교리 탓도 있지만 3백년 가까이 이들 국가를 지배했 던 서구제국주의의 영향도 크다.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영국은 식민지배 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던 무슬림보다는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을 동원해 주 석광산과 고무농장을 경영했다. 농업에 기반하고 있던 말레이계 무슬림들 은 차츰 시장경제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에 의해 지배된 인 도네시아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중국에서 이주한 화교들은 네덜란드인을 대신해 충실한 마름 구실을 했다. 이런 상황은 이 국가들이 독립한 뒤에 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국주의자들이 빠져나간 공간에 부의 축적에 열심인 화교들이 들어서 국가경제 전반을 좌지우지했다.

콸라룸푸르의 KL타워 전망대에서 만난 무슬림 알리(34)는 이곳 라운지에 서 일본인 바이어와 약속이 있었다. “콸라룸푸르는 21세기를 준비하는 도시다. 결코 예전처럼 잠자고 있는 밀림의 도시가 아니다. 우리 무슬림 들도 중국인 못지 않게 뛰고 있다”고 그는 자신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휴대폰이 울리자 듯 총총히 사라졌다. 도무지 열대 도시의 나른함을 느낄 수 없다.

나른함은 옛말

(사진/차도르와 자가용 스쿠터가 인상적인 콸라룸푸르의 무슬림 여성. 말레이시아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높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들어서면 노랗고 빨간 원색의 단일한 유니폼을 입고 차도르를 한 여성들이 떼지어 공항에 모여있는 모습을 보 게된다. 이들은 지금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또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비 행기를 기다리는 해외 송출 노동자들이다. 인도네시아는 필리핀에 버금가 는 여성 인력송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도네시아가 여성 들에게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거의 40% 가 넘는 여성들이 경제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보내오는 외화는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 근대화에 중추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공항에서 차로 약 30분이면 도착하는 자카르타 시내는 출퇴근 시간도 아 닌데 도로는 만원이다. 난폭하기로 동남아시아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카르타의 운전자들은 용케도 이 정체 구간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외국인들 사이에 친절하기로 소문난 ‘블루버드’택시의 운전사 이스마일 (45)씨는 최근 택시회사에서 차종을 바꾼다는 소식에 들떠있다. 새 차는 배 이상의 수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택시회사가 바꾸려고 하는 차 종은 ‘티모르’. 인도네시아 정부가 국민차로 선정한 한국의 ‘세피아’ 라이센스 모델이다.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은 인도네시아가 국민차에 60% 이상 부품 국산화 와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부품 수입관세(현행 65%)와 사치세(특소세 해당) 를 면제해 주는 파격적인 국산차 육성계획이다. 기아는 4월까지 4만5천대 의 세피아를 인도네시아에 수출할 예정이며 자카르타 인근 치캄펙에 국민 차 생산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미국-유럽 자동차 메이커 와 정부는 이 사업이 공정한 경쟁에 위배된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제 소해 국제적인 통상분쟁이 진행중이지만 수하르토 정권은 전혀 개의치 않 는 분위기다.

(사진/필리핀 민다나오섬의 모로민족해방전선 병사. 최근 이곳에서는 20여년간을 끌어온 내전을 종식시키고 경제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최근 동남아시아 지역의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관심 이 고조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종교적인 열정들이 확산되고 있다 고 한다. 지난 2월 라마단 단식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증가했다고 이곳 방 송들은 전한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작용을 서구적 민주주의 양식보다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찾으려는 새로운 경향들이다. 또한 경제적 여유를 가진 무슬림 중산층들은 몇 차례 씩 메카 성지순례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데는 교리 자체보다는 외부적인 영향 이 적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많은 이슬람 연구가들은 “점 증하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의 만연, 독선적인 집권 정당과 정치지도자에 대한 환멸 등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빈부차이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작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무슬림 들은 화교들이 경제적인 부를 독점하고 있다며 상점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종교적 열정으로 경제력 키운다

20여년 동안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무슬림 반군들은 라모스 정부와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주아리 의장은 “오랜 분쟁의 원인은 민다나오 지역의 상상을 초월하는 빈곤에 있다. 우리는 가톨릭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이곳의 경제적 부를 나누기를 원한다. 우리는 분쟁을 종식하고 발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슬림은 동남아시아에만 2억5천만명, 전세계에는 10억에 가까운 숫자다. 이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 변방에서 맴돌며 경제적인 소외를 겪어야 했다 . 그러나 지금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을 필두로 무섭게 경제발전을 위 해 달려들고 있다.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진 무슬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 미지는 아마도 동남아시아 무슬림들의 경제적인 성공을 통해 조만간 바뀌 게 될지도 모른다.

콸라룸푸르, 자카르타=글·사진 이상엽/ DOCUNET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