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부담없는 인사동 명소 순례

(사진/인사동 거리 곳곳에 전통찻집이 자리잡고 있어 넉넉한 쉽터 구실을 한다. 문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드는 찻집 `귀천'.)

인사동을 찾는 사람들을 조금 난처하게 만드는 게 있다. 작품보다 가격에 먼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일반인들은 그저 ‘둘러보기’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근접을 기꺼이 환영하는 인 사동엔 가벼운 마음으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명소가 적지 않다.

안국동 로타리쪽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왼편에 ‘학고재’라는 이름이 눈 에 들어온다. ‘옛 것을 배우는 집’(學古齎)이라는 이름처럼 먼저 고미 술로 인사동의 첫 눈가심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면 학고재 옆 ‘선천집’을 찾아보자. 운보 김기창, 모윤숙, 김광균, 김 동리 등 이집 장맛에 반해 자주 찾았다는 문인들의 발자취를 혀끝으로 더 듬을 수 있다. 배를 채운 뒤 ‘토토의 오래된 물건’ 또는 맞은편 ‘토인 ’의 문을 열어보자. 외국 장식품에서부터 60~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 너덜너덜한 <어깨동무>, 라면땅 등 바라만 봐도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 은 향수물품이 그득하다. 인사동에 왔으니 미술관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박영효 선생 생가였던 ‘경인미술관’에 가면 미술관 바깥에 머무는 사람 이 더 많다. 흙이 깔린 한옥 마당을 한가로이 거닐면 목련 꽃이 연못에 후두둑 떨어진다. 나오는 길에 전유성이 운영하는 ‘학교종이 땡땡땡’에 서 초등학교 시절로 잠시 돌아가보고 ‘인사갤러리’, ‘갤러리 사바나’ 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멋도 부려본다. 천상병 시인을 기억하는 이라면 ‘귀천’은 어떤가? 3평 정도의 조그마한 찻집이지만 하늘로 돌아간 시인 과 이승에 홀로 남은 목순옥 여사를 함께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인사동을 더욱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새가 날아다니는 ‘옛찻집’ 을 빼놓을 수 없다. 동박새, 문조, 십자매 등 15마리의 새가 머리 위를 휘휘 날아다니고 시냇물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아늑한 곳 에서 떡과 유과가 곁들여진 대추차 한잔에 팍팍한 무릎팍을 두드리노라면 세상근심은 저만치 가버린다.

인사동에 들른 김에 아예 겉모습부터 바꾸고 싶다면 개량한복 가게 ‘질 경이 우리옷’에서 새옷으로 갈아입자. `임꺽정'의 우리옷도 질경이 제품 이다. 우표나 옛날돈에 관심이 많다면 질경이 옆 ‘고전사’를 건너뛰지 말자. 너무 작은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없는 게 없다. 엽전만도 3 천여종이나 갖고 있다. 1백만원이 넘는 것도 많지만 3천원짜리도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 문인들이 많이 찾는 카페 ‘평화만들기’에 안착하자. 운이 좋다면 낯익은 소설가, 시인들과 한데 어울려 맘껏 취해볼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한푼도 없다면, 그냥 걸어다녀보자. 차 없는 일요 일엔 사람구경도 재미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