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인사동 거리의 ‘문화혁명’

(사진/예술이 숨쉬는 차없는 거리의 풍경. 어린이들이 도자기를 빚으며 전통을 배우고 있다. )

흥겨운 잔치였다. 차없는 거리가 처음 실시된 4월13일 일요일 한낮의 인 사동은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띠었다. 이날 오전 11시 개회식 선언과 함 께 오색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새로운 인사동은 시작됐다. 이제 매 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인사동은 ‘차가 다닐 수 없는 거 리’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크랙션 소리에 묻힌 전통 되찾는다

그 첫날, 평소였으면 문을 닫았을 공예품점, 화랑, 갤러리 등이 시민들의 내왕을 반가이 맞았고 아스팔트 도로 중앙에는 3~4m 간격으로 도자기, 토 우, 민속공예품 좌판 2백여개가 촘촘히 늘어섰다. 도예 실연과 초상화를 그려주는 무명화가들까지 포진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상투를 틀고 춤을 추는 호박엿 장수, 옛한복을 입은 장정이 떡메 를 내리치면 머리를 곱게 땋은 어여쁜 낭자가 고물을 묻혀 내놓는 인절미 등은 입 안에 군침까지 돌게했다. 여기에 거리를 지키는 포졸들이 옛 복 장에 수염을 단 채로 지나다녀 마치 민속촌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도 했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과 외국인들은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느라 정신 없다.

이밖에 ‘인사전통문화보존회’(회장 이호재)쪽이 마련한 어린이 전통다 례, 길놀이춤, 사물놀이, 북춤, 남사동 놀이, 전통혼례 시연, 취타대 공 연 등이 30분~1시간 간격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마치 거대한 공연장에 온 듯, 가만히 서 있어도 구경거리들이 연신 눈 앞을 지나다녔다. 무엇보다 길 비키라고 짖어대는 “빵빵” 크랙션 소리가 없어 좋았다.

이날 인사동 거리에는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온 가족들이 많았 는데 온가족과 함께 인사동을 찾은 민형원(45·덕성여대 철학과 교수)씨 는 “진작에 이랬어야죠. 대도시에선 사람이 길을 걸을 때 지각의 80%를 교통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데 쓴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빼앗겼던 지 각을 온전히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차없는 거 리는 대단한 문화혁명입니다”라고 말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들 은 “아픈 다리를 쉴 수 있는 녹지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한가 닥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어 ‘세계의 거리’ 같은 인상도 풍겼다. 전통혼례 구경에 넋을 잃은 여행객 짐 와킨스(35)는 “한국의 옛 풍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너무 좋고, 정말 재미있다”면서 연신 “판타스틱”을 연발했다. 그는 노란 옷에 날라리 소리를 울리는 대 취타 행렬이 지나가자 말을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 다.

모두가 그렇게 기뻐했다.

(사진/인사동이 차없는 거리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북과 장구가 어우러진 민속놀이 공연 모습.)

인사동의 이런 제모습 찾기는 ‘인사전통문화보존회’의 노력이 컸다. 지 난 87년 올림픽에 대비하기 위해 인사, 견지, 관훈, 낙원, 공평, 경운동 등 이 지역 6개동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친목단체 성격 의 ‘인사동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이후 매년 10월 인사동 축제를 개최해 오며 인사동의 부흥을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점차 인사동에 국적 불명의 외래문화가 파고들고, 불황의 파고가 덮치면서 화랑, 골동품점이 떠난 자리에 술집, 카페 등이 들어서는 등 점점 엉뚱한 모습으로 변모하 는 데 이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 없는 거리’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위기가 제공한 하나의 ‘기회’라고도 하겠다. 이호재 회장은 인 사동을 “옛 골동품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곳”이라며 “살아있는 문화박물관인 이곳은 내버려두면 그냥 오염되고 말지만 조금만 관심을 주면 그 자생력으로 인해 금세 되살아날 것”이라 고 강조했다.

일제 약탈 관문에서 ‘문화박물관’으로

이 인사동이 언제부터 ‘인사동’이었는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랫동안 인사동에 살아온 이들도 그저 “경복궁과 종로거리 사이에 위치 했기 때문에 고미술품이 이곳에 몰린 것 아니냐”고 짐작할 뿐이다. 1914 년 이곳의 본래 지명인 관인방과 대사동의 두 글자를 따 지어진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골동품 골목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 연혁은 조선 초기 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인사동 거리 일부인 현재의 견지동에 조선시대 회 화를 가르치고 국가고시를 치르던 ‘도화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화원 의 영향으로 이 일대가 조선조 미술활동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

또 궁궐과 인접한 탓에 조선시대부터 이율곡, 이완 장군을 비롯해 구한말 엔 박영효, 민영환 등 쟁쟁한 사대부 집안들이 터를 잡고 살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골동품 매장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때부터다. 1906 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조선통감부 통감 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은 급속히 골동품 거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일 본인들의 광적인 조선예술품 수탈 시작과 맞물려 옛 도자기를 비롯한 귀 중한 문화유산이 인사동으로 집결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 갔다. 전통문화예술의 보루로 인식되고 있는 곳이 한때는 외세의 약탈 관 문이었던 셈이다.

30년대 들어 인사동 주변에 골동품 외에 고서적, 고미술품 및 고가구 상 가가 들어서기 시작해 다양한 예술품 거래처로 변모했다. 45년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그동안 긁어모았던 각종 고예술품들을 급하게 처분하면서 인 사동은 우리 골동품을 일본인의 손으로부터 다시 우리에게 되돌리는 장터 구실을 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 명동·충무로의 골동품 상가가 땅값 상 승 등으로 쇠퇴하게 되자 인사동은 싼 임대료와 상가집결을 무기로 골동 품·고미술 거리로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했다. 60년대 말에는 ‘구하산방 ’을 시초로 3~4개의 필방이 간판을 내걸었고 70년대 초에는 표구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최초의 근대적 상업화랑인 ‘현대 화랑’이 문을 열고 70년대 후반 이후 화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미 술문화적 성격이 두드러진 거리로 바뀌었다. 또 뒷골목을 중심으로 정취 가 가득한 음식점, 찻집이 화가·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면서 우리가 떠올리는 무형의 ‘인사동 문화’가 자리잡았다.

신세대·외국 문화에 전통 질식 위기도

(사진/한국인의 전통혼이 깨어나고 있다. 전통의 향기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 인사동 거리.)

그런데 90년대 들어 인사동은 다시 한번 변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화 랑과 전시장이 늘어난 것 이상으로 골목 안쪽으로 카페와 술집, 식당이 폭증했다. 최근엔 발랄한 신세대 문화에 이국문화마저 끼어들고 있다. 1~ 2년 전부터 주말이 되면 페루, 멕시코, 인도, 미국, 동유럽 등 전세계에 서 몰려온 외국인 노점상들이 자국의 토산품, 액세서리 등을 거리에 펼쳐 놓고 보디 랭귀지로 물건을 판매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약간 때묻은 듯 보이는 이런 물품들은 실은 남대문시장에서 떼온 것들이 많다) .

이때부터 인사동의 위기감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80년대 호황 이 후 비대해진 미술시장의 거품이 걷히고 끝도 없는 불황이 이어져 20년 전 통의 종각화랑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신세대풍 제과점이 들어서고, 길 건너 덕원갤러리 1층 전시장이 잘려나가고 은행이 입점하고, 현화랑 자리 에 찻집이 들어섰다. 전성기때 2백50여개에 이르던 골동품·고미술상도 절반에 가까운 1백72개로 줄어들고 말았다. 잠시 잠깐 뒤면, 인근 종로의 ‘먹자’문화가 그대로 집어삼킬 판이다.

다행히 인사동이 최근 부흥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한가닥 위안을 주고 있다. 최근 자꾸만 움츠러들던 인사동 화랑가에 연건평 2백40평, 전 시공간 4곳을 갖춘 ‘갤러리 상’이 새로이 들어섰다. 또 오랫동안 성화 빌딩에 곁방살이를 해온 창립 14년의 가나화랑이 대지 2백20평, 연건평 1 천2백평,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의 내집을 장만해 내년 9월께 완공할 예정이다. 또 있다. 인사동 터줏대감인 고미술 전문 공창화랑도 인사동 사거리에 건물을 인수해 30년 만에 내집을 갖게 됐고, 창립 20주년의 선 화랑도 올해 안에 10층 규모의 토탈아트센터 신축공사에 착수할 계획이어 서 화랑내음 그득할 인사동 풍경에 미리부터 기대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최근엔 부동산 사무실에도 얼마 전처럼 레스토 랑, 카페가 아닌 화랑 임대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다시 늘고 있다. 고목에 새 움이 트듯 인사동이 오랜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향기에 취해 전통을 노래하자”

인사동은 한국인의 ‘마지막 혼’을 간직한 곳이다. 주변에 빌딩이 점점 올라가는 세월의 숨가쁜 개발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고 흙묻은 토 기, 엽전 한닢, 무명화가의 그림 하나하나를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공간 이 인사동이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아직도 고즈넉함을 잃지 않은 곳, 그 곳에 가면 시계바늘이 천천히 돌아간다.

오늘은 인사동에 가보자, 유유자적하면서 옛 향기에 취해도 보고, 뒷골목 에 퍼질러 앉아 옛 선비 풍류도 흉내내 보자. 우리에게 아직 인사동이 남 아 있다는 건 그건 사람냄새가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반증인지 도 모르겠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