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연천 농군의 슬픈 눈망울

(사진/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처참하다. 물난리로 연천군에서만 소 4백30여마리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그곳의 봄은 따뜻했다. 지난해 30여년 만의 물난리를 겪은 이곳에도 어김 없이 봄이 찾아들었다. 겨우내 힘을 갈무리한 농부의 일손이 제철을 만난 듯 바쁘다. 마을마다 자갈밭이 된 논밭을 갈아엎어 객토를 하느라 분주하 다. 이미 농경지 구획정리를 마치고, 논에 물을 대는 곳도 눈에 띈다. 수 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모내기를 앞둔 농부들의 손 길에는 희망이 담긴다.

그러나 연천의 소사육 농가는 아직도 절망의 그림자에 덮여 있다. 자식같 던 소들을 물난리통에 잃어버린 이들에게 봄은 멀기만 하다. 땅을 고르며 농사를 준비하는 농군의 처지가 부럽다. 그렇게 희망에 차 일손을 놀리고 싶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시름만 깊어간다. 이돈 저돈 끌어모아 축사를 다시 짓고 송아지를 사들였으나, 최근 소값이 폭락하면서 제값을 받을 수 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한푼이라도 건지려 입식 서둘렀는데…

군남면 삼거2리 이철민(38)씨는 요즘 사는 재미가 없다. 소에게 사료를 주는 손에도 힘이 없다. 소를 쳐다보는 눈길에는 그저 근심만 가득하다. 괜히 소를 쳤다는 회의마저 든다. 축사의 톱밥을 갈아줄 시기가 지났는데 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2백만원이라는 돈도 없고, 무엇보다 의욕이 없 다. “소 키워서 뭐합니까. 시장에 내놔도 손해만 볼 텐데요.”

수해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씨는 착유소(젖소 암소) 25마리와 후보소( 어린 젖소 암소) 25마리를 키웠다. 착유시스템도 갖춰 놓은 제법 그럴듯 한 전업 축산농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3년부터 돼지를 키워오다, 89년 돼지파동으로 `쫄딱 망하고는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소농사였다. “처음 몇년간은 소값이 좋았어요. 소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죠. 젊은 나이에 이 정도면 운이 좋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빚을 내어 착유기도 들여놓고 규모를 늘려갔죠.”

그러나 지난해 수해는 이씨에게 `돼지파동 못지 않은 깊은 상처를 안겼다 . 목장에서 불과 5백여m 떨어진 임진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소 50마리가 모두 휩쓸려간 것이다. 수마가 스치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뻘건 황토흙 뿐이었다. 이씨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몸서리가 난다.

“5마리만 헤엄을 쳐서 근처 고지대로 피했습니다. 그나마 얼마 뒤에 다 죽었죠. 2마리는 꼼짝도 못하다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떠내려오는 뗏목에 머리를 부딪혀 상처를 입은데다, 거센 물살을 헤쳐나가느라 힘을 모두 써버렸나 봅니다. 나머지 3마리는 모두 만삭의 젖소였습니다. 아마 도 모성애 때문에 한달이나 견딘 것 같아요. 통신이 끊겨 수의사에게 보 이지도 못하고 떠나보냈죠.”

소사육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할 생각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7년여 를 소와 함께 살아온 그에게 소는 가축 이상의 것이었다. 소는 가족이기 도 했다. 마땅히 다른 것을 할 만한 여력도 없었지만, 도저히 소에게서 떠날 수 없었다. 더욱이 군청에서는 빨리 입식(소를 들여 번식시키는 일) 을 독촉했다. 입식을 하지 않으면 복구지원비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 였다. 결국 한푼이라도 건지려면 입식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수해로 잃어버린 소값만 쳐도 1억2천만원입니다. 떠내려간 사료와 작업시설, 망 가진 착유기까지 합치면 2억원 가량의 피해를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정부 에선 고작 3천5백만원을 지원해 주더군요.”

이씨는 정부의 지원비에 축협으로부터 대출받은 1천4백만원, 그리고 농협 에서 대출받은 2천1백만원을 합쳐 송아지 70마리를 사들였다. 모두 3~4개 월짜리 육우(젖소 수소)였다. 착유시스템이 비에 젖어 망가지는 바람에 젖소 암소는 살 수가 없었다. 마리당 90만원 정도 값을 치르니 다시 빈털 터리가 됐다. 그래도 송아지를 사들인 게 흐뭇했다.

그러나 올 들어 소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이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 다. 1년 동안 어미소로 키워 내다팔면 금방 일어설 것이라는 희망은 산산 이 부서졌다. 송아지를 7개월이나 키웠는데도 값은 샀을 때보다도 떨어지 고 있었다. 현재 한살짜리 소는 70만~80만원을 밑돌고 있다. “그동안 먹 인 사료값만 해도 1천5백만원이 넘어요. 3~4개월짜리 송아지는 지금은 20 만~30만원 하지요. 그야말로 육우값이 `개값만도 못한 겁니다. 앞으로 2~ 3개월 있으면 출하를 시켜야 하는데…. 그동안 대출받은 돈과 축사를 새 로 짓느라고 진 빚은 어떡하구요. 그저 2~3개월 안에 가격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기를 바랄 뿐이죠.”

처음에는 이씨도 이렇게 빨리 입식을 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해 9월부터 이미 소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농수산물 전문지에 실리곤 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소값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올해 2~3월께 입 식을 하려고 했단다. 그러나 군청에서는 지난 연말까지 입식을 하도록 독 촉했다. “물론 공무원들의 심정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회계연도 안에 예산을 집행해야 하고, 소사육 숫자를 일정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서 는 수해 농가에서 축사를 포기하는 것을 막아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소값이 떨어지는 것이 뻔한 상황인데도 그렇게 독촉을 할 필요가 있었는 지 모르겠어요.”

7개월 키웠어도 송아지 산값에 못 미쳐

연천군에서 소사육을 하는 농가는 모두 3백여곳이다. 이 가운데 50여 농 가가 적게는 1마리에서, 많게는 50여마리까지 지난 물난리로 소를 잃었다 . 특히 임진강과 한탄강에 인접한 군남면, 청산면 일대 농가들의 피해가 컸다. 연천군청에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간 소만 4 백30여마리에 이른다.

소는 이곳 농민들에게 생명이다. 단지 재산가치로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소는 함께 생활해온 가족의 일원처럼 여겨진다. 그러기에 이들은 지난 수 해 때 떠내려가는 소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연천군 청산면 초성3리에서 소사육을 하는 정칠용(45)씨는 당시 한우 10 마리를 잃었다. 오전 10시30분께 한탄강의 댐 양쪽날개가 무너지면서 이 씨의 축사에 강물이 들이닥쳤다. 살림보다 소가 급했다. 정씨는 근처에 있는 초성초등학교로 소들을 대피시키려고 했지만, 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가 차오르면서 소들의 눈에도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소를 대피시키기 위해 30여분간을 씨름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자 정 씨는 포기하고 말았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소를 묶은 줄을 모두 낫으 로 자르고 축사문을 활짝 열었다. “헤엄이라도 쳐서 살 놈은 살아달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소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마 리도 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씨도 뒤늦게 초등학교로 몸을 피했다. 거기에 행운이 있었다. 평소 호 형호제하며 지내던 잠수부를 만난 것이다. 정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잠수 부는 축사로 달려갔다. 축사는 거의 물에 잠기고 있었다. 잠수부는 우왕 좌왕하는 소를 잡고, 일일이 뿔에 밧줄을 걸었다. 마을사람들도 소 구출 작전에 힘을 보탰다. 초등학교에 대피해 있던 장정 30여명이 달려들어 소 를 한마리씩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9마리를 살릴 수 있었다. 기특 하게도 다른 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거나 높은 곳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10마리는 끝내 구하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이 왜 그렇게 커 보이던지요. 저것들도 생명인데 하는 생각에 불쌍하기도 하고요…. 그때 건졌던 소들 은 다 팔리고,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아있어요. 다리의 힘줄이 끊어지는 바 람에 지금도 일어나다가 퍽 하고 쓰러지곤 합니다. 마지못해 사료를 먹는 모습이 여간 애처롭지 않아요. 그놈도 죽지 못해 사는 것 아니겠어요. 팔 려고 해도 사가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그때 그렇게 생명을 걸고 구했던 소들이라, 소값 폭락은 이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이번 폭락은 인내력과 배짱으로 버 텨왔던 예전의 소값파동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축산농가들의 한결같 은 고민이다. 우선 올 7월부터는 외국으로부터 냉장육이 수입된다. 냉동 육과 달리 냉장육은 육질이 훨씬 좋다. 육질이 한우와 별 차이가 없는 것 이다. 게다가 2001년부터는 소가 산채로 수입된다. 정부는 오는 2000년까 지 5백kg 한우값을 2백만원까지 내리겠다고 공공연히 엄포를 놓는다.

냉장육 수입 소식에 억장이 무너진다

한우는 5백kg 기준으로 지난해 3백20만원에 거래되던 것이 최근 2백40만 원대로 떨어졌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한우값은 더 떨어질 것이다. 육우 는 이미 지난해 5백50kg 기준으로 2백30만원 하던 것이 올 들어 1백30만 원으로 절반 가량이나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축산농가의 경쟁 력을 길러야 한다며 규모를 크게 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

청산면 대전리 김아무개(49)씨도 남편과 함께 한우를 기르다 지난해 30마 리를 수해로 떠내려 보냈다. 그는 이렇게 하소연한다. “시집와서 25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기반을 닦으려나 했는데 수해로 물거품이 됐어요. 그 래도 다시 살려고 하는데 이번엔 소값파동이 닥치네요. 농민들도 대규모 사육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아요. 하지만 돈이 있나요. 수해 복구한다고 빚까지 졌는데요.”

이용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