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머슴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

머슴이라니.

국정을 온통 말아먹은 정태수씨에게는 확실히 탁월한 데가 있다. 진실을 다부지게 피해가거나, ‘배후’를 철저히 보호함으로써 훗날을 기약하는 처세의 탁월함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문일침의 머슴론에서 빛을 발한다. 이 발언에 이르러서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의 이치를 이 해할 법하니 말이다.

언급은 지극히 간단하다. “돈문제는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들이 어떻게 아느냐.” 그러나 세상을 주인과 머슴으로 간결하게 분리해 파악하는 그 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데 더이상 설명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기대를 모았던 국회 청문회가 난파 직전으로 내몰리고 개편된 대검 중수 부가 한달여만에 정치권의 시녀로 회귀 조짐을 보이는 현실, ‘법대로’ 를 앞세워 유력한 대권주자로 발돋움한 이회창 대표가 ‘정치적 담합’을 선언한 현상 따위는 정씨의 주인-머슴이라는 틀을 들이댈 때 비로소 해석 이 가능하다.

청문회부터 보자. 시종 김현철의 때를 벗기고 상대당 수뇌부를 한보 흙탕 물에 끌어들이려던 이 아무개 의원은 성이 차지않자 특위 위원직을 내던 졌다. 계보 보스의 때를 벗기려 안달이던 맹 아무개 의원은 오히려 보스 의 혐의를 확인하는 웃지못할 결과를 빚었다. 청문회는 여야간의 이같은 행태의 충돌로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고물 기관차꼴이 됐다. 그들은 누군 가의 머슴이었다.

검찰도 다르지 않다. 성역없는 수사를 내걸고 중수부 수사팀을 교체한 검 찰 수뇌부에선 요즘 희한한 협박이 흘러나온다. “현철이를 구속시킨다면 대통령이 하야할 수 밖에 없고 그리 되면 헌정중단을 피할 수 없다.” 꼭 현철씨의 비리에 대통령도 연루돼 있다는 뜻 같지만 실은 현철씨 구속이 곧 헌정중단이라는 협박이 본래 취지다. 절대왕정때도 없던 비약이다. 영 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지만 조선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했다. 그들은 새경만을 바라는 머슴 수준도 아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지난 8일 기자회견때 “현철씨의 의혹에 대해 성역없이 규명하고 처벌해야 한다”며 튀긴 침이 채 마르기도 전인 12일 ‘조속한 마무리’를 주인에게 건의했다. 해방을 꿈꾸던 그도 머슴의 본 분으로 돌아간 셈이다. 사석에서 했다는 “현철이만은 봐달라”는 그의 부탁이 들려온다.

재계나 관계는 첨언할 필요도 없다. 한보 부도 당시 신광식 제일은행장과 임창열 재경원 차관은 “부도내면 생이빨 빼는 거나 마찬가지니 신중 대 처하라. 부작용이 나면 몸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정씨의 협박을 넋 놓고 들어야 했다. 머슴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정씨에게 코뚜레를 꿰였다.

세상은 실소한다. 재벌이나 3김의 머슴이 아닌 국회의원이 얼마며 권력자 의 종이 아닌 공직자는 또 얼마인가. 국민은 자조한다. 나는 주인인가 머 슴인가. 아무래도 머슴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왕 정인가 민주제인가.

생각할수록 정씨의 머슴론엔 혜안이 번뜩인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