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
|
격동하는 재벌 |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
|---|
(사진/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의 취임식. 이 회장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삼성은 토끼, 정부는 거북이.”
최근 삼성그룹의 3세 승계를 위한 사전포석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 데 `‘세금부담 없는 부의 세습’이라는 삼성의 절묘한 절세수법에 `‘닭 쫓던 개’처럼 당하고만 있는 세제당국을 빗대어 나오는 말이다.
이건희 회장을 둘러싼 설…설…설
삼성그룹 이건희(55) 회장의 장남인 재용(29)씨는 지난해 계열사인 중앙 개발과 제일기획의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올 3월 말에는 삼성전자의 주요주주가 됐다.
이같은 삼성의 `‘3세 승계 작전’은 잘 연출된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삼성의 비상장 계열사인 중앙개발은 지난해 12�9월 초 9억5천4백59만원어 치의 사모 전환사채(CB)를 주당 전환가액 7천7백원 조건으로 발행했다. 재용씨는 이때 발행물량의 97%를 사들였다. 기존 대주주인 중앙일보(48.2 %), 제일모직(14.1%), 이건희 회장(13%) 등이 모두 CB를 사지 않았기 때 문이다. 사모는 일반인들을 청약자로 하는 공모와는 달리 CB 인수자를 발 행회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점을 삼성이 이용한 것이다. 전환사채란 일정기간(상장기업은 3개월)이 지난 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채권이다. CB를 산다는 것은 결국 그 회사의 주식을 사는 것과 같다. 재용씨는 CB의 일부를 지난해 12월 말 주식으로 바꿔 지분율 31.9% (62만7천3백90주)의 중앙개발 최대주주가 됐다. 재용씨가 나머지 CB를 모 두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지분율은 62.5%로 더욱 높아진다.
재용씨가 제일기획의 최대주주가 된 과정도 비슷하다. 국내 최대 광고대 행사로 비상장사인 제일기획은 지난해 3월22일 18억원어치의 사모CB를 주 당 전환가액 1만원 조건으로 발행했다. 재용씨는 기존 주주인 삼성전자, 신세계, 삼성물산 등의 협조 속에 그 대부분을 사들였다. 재용씨는 보유 했던 CB를 바로 주식으로 바꿔 지분율 29.7%(29만9천3백75주)의 최대주주 가 됐다.
삼성은 또 지난 3월24일 삼성전자가 발행한 사모CB 6백억원어치 중 4백50 억원어치를 재용씨에게 몰아줬다. 주당 전환가액은 5만원. 재용씨가 CB를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얻게 되는 삼성전자 지분은 0.78%(90만주)이다. 부 친인 이 회장 지분(3.1%)의 4분의 1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이 현 시점에서 3세 지분승계 작업을 서두르는 이유는 뭘까 . 이 회장은 아직 50대로 한창 일선에서 뛸 나이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를 졸업한 재용씨도 올초부터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신분이다. 재계에서는 “이 회 장이 심각한 병에 걸려 더이상 그룹 경영을 하기가 어렵게 됐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식석상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는 등 여러 소문이 무성하다.
그러나 삼성은 “터무니없다”며 일축한다. “우리도 소문을 들었다. 재 용씨 건은 이 회장이 보유재산을 미리미리 조금씩 넘겨주는 과정으로 보 면 된다.”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지승림 전무의 설명이다. 갑자기 3세 체 제로 전환할 때 생길 수 있는 내부충격을 최소화하고 절세를 하기 위한 사전상속 차원이라는 것이다.
삼성 장악의 비밀, 계열사간 출자
그렇다면 지분승계의 1차 대상기업이 왜 중앙개발과 삼성전자일까. 답은 간단하다. 중앙개발과 삼성전자의 그룹 내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 이다. 중앙개발은 삼성그룹의 부동산관리회사이다.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 드와 안양, 안성, 동래에 있는 3개의 골프장, 그리고 삼성 계열사의 입주 빌딩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또 전국 각지에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땅 을 배경으로 콘도 및 스키장 사업진출을 추진하고 있는 국내최대의 부동 산회사다. 증권가에서는 이 회장 소유의 부동산 관리까지 중앙개발 몫이 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중앙개발은 자본금이 98억1천만원에 불과하다. 반면 자산은 8천3백87억원 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장부상 수치일 뿐이다. 부동산 대부분이 20~30년 전 취득 당시의 낮은 가격으로 평가돼 있는 것이다. 현 시가대로 하면 실 제 자산은 5조원대에 이른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가정이지만 중앙개발이 청산선언을 하고 자산을 모두 팔아 빚(6천8백6억원)를 갚은 뒤 나머지 재 산을 주주들에게 나눠준다면 재용씨는 당장 2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재산 을 거머쥐게 된다. 삼성에서는 “4백50만평 규모의 에버랜드나 계열사 입 주빌딩이 모두 중앙개발 소유는 아니다”라면서 “중앙개발의 자산에 대 한 항간의 평가가 과장돼 있다”고 반박한다.
삼성전자는 삼성의 간판기업이다.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고전한 지난해에 도 5조8천7백억원의 매출과 1천6백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총자산은 5조 8천억원에 이른다. 계열사가 23개로 국내 재벌랭킹 16위에 올라 있는 한 솔보다도 규모가 크다. CB 인수에 따른 자본이득도 막대하다. 상장사인 삼성전자의 주식값은 현재 주당 6만원을 넘는다. 한때는 14만원대까지 오 른 적도 있다. 재용씨가 인수한 CB를 주식으로 바꿔 시장에 내다 팔면 당 장 90억원의 시세차익을 얻게 된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최근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개당 11~12달러로 회복되고 있어 주식값도 올해 안에 8만~ 10만원까지는 오를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8만원으로 가정하면 예 상 시세차익은 2백70억원으로 불어난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진가는 삼성그룹의 소유 및 경영구조에서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중핵기업’이라는 점에 있다. 투신사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계열사에 대한 지분출자를 통해 소유주인 이건희 회장이 계열기업을 지배 할 수 있도록 중간 연결고리 구실을 하는 중핵기업 중의 하나”라고 지적 한다. 이 회장과 특수관계인(친인척과 임원), 삼성 계열사들이 갖고 있는 삼성그룹 내부지분율은 49%에 이른다. 그러나 이 회장 개인 지분은 1.2% 에 불과하다.
1% 남짓의 적은 지분을 갖고 있는 이 회장이 계열사수 80개에 자산이 51 조6천억원에 이르는 거대 삼성그룹을 장악할 수 있는 비밀이 바로 거미줄 처럼 얽혀 있는 계열사간 출자에 있는 것이다. 삼성 계열사 및 관계사 가 운데 삼성전자가 출자하고 있는 회사는 총 90개. 주요기업만 살펴봐도 삼 성할부금융(99%), 삼성카드(56%), 삼성데이타시스템(36.7%), 삼성자동차( 24.8%), 삼성중공업(21.2%), 삼성전기(20.9%), 제일기획(14.8%), 삼성코 닝(11.2%), 삼성석유화학(9.9%), 삼성정밀화학(9.6%), 삼성항공산업(8.5% ), 삼성전관(8.4%), 삼성종합화학(3.8%)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삼 성전자의 지배력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회장이 자신이 삼성전자 주식 3.1%를 갖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삼성이 증시에 상장한 14개 계열사 가운데 이 회장 지분이 있는 회사는 전자, 물산, 화재 등 3개사에 불과하다.
‘사모전환사채’라는 요술방망이
재용씨는 중앙개발과 삼성전자, 제일기획의 지분을 획득하면서 한푼의 세 금도 내지 않았다. 현행 세법은 대가없는 부의 세습을 막기 위한 각종 규 정을 두고 있다. 비상장기업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식을 제 가치보다 싼값으로 넘겨주면 증여로 간주해 세금을 물리고 있다. 재용씨 가 세금을 피한 비법(秘法)은 CB라는 `‘요술 방망이’를 이용한 데 있다 . 지난해까지는 신종 금융상품인 CB를 이용해 사전상속이나 증여를 하더 라도 세금을 물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세금을 물리지 못 하는 것은 지난 3월 말 이루어진 삼성전자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올해 부터 시행된 개정 상속세법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신설된 상속세 법 40조(전환사채 이익에 대한 증여의제)는 “특수관계인(계열사나 친인 척)으로부터 CB를 취득한 경우 CB의 취득가액과, CB를 주식으로 전환했을 때 주식가액과의 차액은 특수관계인으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회사가 발행한 CB를 취득한 특수관계인으로부터 다시 CB 를 사들여 주식으로 전환했을 때 차액이 생기면 증여세를 물린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이 조항은 재용씨의 경우처럼 발행사로부터 직접 CB를 취득한 경우는 과세대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 재정경제원 세제실은 재용씨에 대한 증여세 부과 여부는 좀더 검토해 봐야 한다는 견해지만 과세당국인 국세청은 “조세법률주의에 따라 과세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세제 당국이나 현행 세법이 삼성의 절세수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계와 증권계에서는 “삼성의 절세를 통한 세습 수법은 예술의 경지”라 는 감탄까지 나오고 있다. 또 상속·증여세는 다시 한번 ‘바보세’로 전 락했다.
삼성의 `이재용 ‘재산늘리기 및 절세작전’은 95년 말로 거슬러올라간다 . 이 회장은 당시 재용씨에게 60억8천여만원을 증여했다. 재용씨는 증여 세 16억원을 내고 남은 돈으로 계열사인 에스원 주식 12만1천8백주(23억 원)와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47만주(19억원)를 사들였다. 에스원은 96년 초 상장된 뒤 주식값이 꾸준히 올라 바로 30만원대로 올라섰다. 재용씨는 올해 초까지 에스원 주식을 3백57억원에 모두 매각했다. 삼성엔지니어링 역시 지난해 상장된 뒤 주식값이 크게 뛰었다. 재용씨는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올 2월 2백30억원에 팔았다. 증권 관계자들은 에스원과 삼성엔지 니어링의 주식값을 올리는 데 삼성 계열의 금융기관들이 보이지 않는 구 실을 했다고 말한다. 삼성은 결국 이 회장 부자간의 증여를 시작으로 비 상장 계열사 주식 매입-증시 상장-주식값 급등 뒤 보유주식 매각이라는 단계를 거쳐 5백27억원의 거금을 재용씨에게 안겨주었다. 이 돈은 중앙개 발과 삼성전자, 제일기획의 CB를 사들이는 종잣돈으로 활용됐다.
다음 타깃은 삼성생명과 삼성물산
증권 전문가들은 삼성의 재용씨 재산불리기가 제일기획에서 다시 한번 재 현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일기획은 중앙개발이나 삼성전자와는 달리 수 익성은 높은 대신 자산이 얼마 안 되고, 다른 계열사 지분도 거의 없기 때문에 상장을 시킨 뒤 주식값이 많이 오른 시점에서 보유주식을 모두 내 다팔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제일기획은 기업공개를 추진중이다. 제일 기획 관계자는 “증시상황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지만 이르면 올해 말, 늦 어도 내년중에는 상장이 가능할 것”이라면서 “상장 후 주식값은 주당 최소 5만원에서 최대 20만원까지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당 가격을 최소 예상치인 5만원으로 보더라도 재용씨의 자본이득은 1백30억원에 이 른다.
삼성은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3세 지분승계가 계속 될 것이라고 공 언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재용씨의 다음 타깃은 삼성생명과 삼성물산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회사가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의 3대 중핵기 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에 대해 “상속세법이 갈수록 강화 되고 있는 터에 절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재산을 넘겨주는 것을 나쁘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전상속은 그룹이 장차 3세체제로 넘어갈 때 내부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벌그룹이 대가없 는 부의 세습을 위해 벌이는‘게임’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경제력집 중과 문어발식 확장만큼이나 곱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