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국민이여 군주가 되라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

현 시기에 이르러 우리 사회는 총체적 파국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무엇보다 ‘현철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대통령 친위사단이 저지른 유 례없는 전횡과 비리가 현정권의 정통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런 가운 데 한보사건의 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연일 열리고 있고 정치권의 내 로라 하는 유력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는 진 실을 규명하기보다 오히려 실상을 숨기고 몸체를 보호하는 액막이굿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경유착의 체제 아래서 많은 정치인들이 ‘검은 돈줄'에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남으로써 ‘깨끗한 자가 있으면 나 서서 돌로 치라'고 한들 나설 정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지 의심스럽다 . 이런 와중에서 대권주자들 간의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간의 경쟁은 대권장악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이런저런 보수들 간의 권력 암투로 전락하고 있다.

홉스적 해결과 스피노자적 해결

이러한 정치권의 혼미에 화답이나 하듯 한국의 경제 역시 불황의 늪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불황을 만든 장본인은 보수정치의 보호 아래 우리 경제 전반을 좌지우지했던 독점재벌들이다. 그렇건만, ‘경제살리기' 운 동은 한편으로 일하는 국민 일반을 희생시키고 독점재벌을 더욱 살찌우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정치로 향한 국민적 불만을 호도시키는 방책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 시기에 이르러 한국사회는 보수정치가 안겨 준 중병에 걸려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기의 해결책으로서 두개의 상이한, 서로 대립되는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중을 개인으로 해체시키고 탁월한 군주나 강력한 국가에 위기 해결을 내맡기는 ‘홉스적 해결책'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개인으로의 해체에 반대하고 일반 백성들 자신이 위기 해결의 주체로 나 서는 ‘스피노자적 해결책'이다.

주지하다시피, 영국혁명기의 이론가인 홉스(T. Hobbes)는 국가 수립 이전 의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상태'로 묘사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탈피하기 위해 생명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개인들은 자신의 권리 전체를 자발적으로 국가에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홉스는 그가 말한 ‘만 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실제로는 그 시기에 진척되고 있었던 ‘지 배층과 다수대중간의 내전상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 비히모쓰>(Behemoth)에서 “찰스 1세의 실패는 인민이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로 단결하는 것을 막을 충분한 강권을 소지하지 못한 데 있다"면서 단결된 대중을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 하고 있다. 이 점에서 홉스는 ‘개인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국가 수립' 이라는 매우 그럴싸한 논리를 내세우며 국가이론를 구성하고 있지만, 실 제로 그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이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즉 “단 결된 힘으로 뭉치려 하지말고, 국가 앞에 오직 개인으로서만 나서라. 그 런 자들에게만 생명보존의 권리를 인정하겠다”는 엄청난 협박을 담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앞에 오직 개인으로서만 나서는 국민이란 실제로는 무권력의 종복, 무권리의 신민들에 지나지 않음을 동시대인인 스피노자(B. Spinoza )만큼 꿰뚫어 본 이는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리란 권력과 함께 있는 것이므로 개인 혼자만으로는 별다른 권력과 권리를 지니지 못 한다", “지배자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만큼 자신의 권리도 확장하며 , 각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으로 뭉친 다중으로서 대항하는 인 민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에만 권리를 소지한다", “인민은 군주의 관점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지배자들은 개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 지 않는다. 그들은 다중을, 대중을 두려워 한다."

옛 질서를 혁파할 수 있는 용기

우리 사회가 재벌경제와 유착된 보수정치가 부른 총체적 파국의 위기에 빠져든 오늘, 이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근본적인 사회 민주 화를 가능케 하는, 위기해결의 스피노자적 길을 선택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를 위정자와 정치권의 정치 가들에게 내맡겨두지 않고, 국민들을 단지 방청객으로 만든 검찰조사와 청문회, 또는 국민을 단지 개인으로 호명하는 대선 등에 기대지말고 국민 들 자신이 나서서 스스로를 진정한 주권적 권력을 지닌 정치적 힘으로 조 직, 부패하고 악취나는 옛 질서를 혁파하기 위해 직접 뛰어드는 것을 의 미한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 없이 옥동자를 나을 수 없듯, 낡은 것을 새 로운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그 러므로 새로운 정치를 탄생시킬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국민은 자신을 짓누르는 종속된 신민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유는 오직 용기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더이상 새로운 군주를 모시려 하지 말고, 스스로 군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