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이회창 다급해졌다

(사진/4월10일 이회창 대표가 주재한 안보대책회의 이 대표의 당 장악력과 정국 풀어가는 솜씨에 대한 회의론이 비등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3월13일 이회창씨를 신한국당 대표로 지명했을 때는 다른 술수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이회창 대통 령’으로 가더라도 양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황이 되는대로 맡기겠다 는 뜻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런 (최근의) 상황이 그대로 가면 5월 말이나 6월 초쯤 YS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른 다”

“5월 초엔 민주계 입장 드러날 것”

여권의 대란은 바로 신한국당의 대선구도 변화로 이어진다. 대란 자체가 바로 9룡의 용쟁호투라는 말도 된다.

일차적 변화는 한보사태를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김심’의 복권 가능성 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김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신한국당의 한 중진의원 은 최근 사석에서 “물론 김 대통령을 다시 복원시켜 예전의 힘을 회복시 킬 수는 없다, 그는 이제 역사 속에서 평가될 뿐이다”라고 전제하면서도 `‘김심’이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다시 주요한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김심의 복권을 점치게 하는 조건이 당 안팎에서 이미 무르익고 있다는 분 석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우선 민주계의 움직임이다.

부산 출신 민주계 한 중진의원은 최근 “5월초 정도면 (후보 경선에 대한 ) 민주계의 입장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민주계가 여의도에 공동사무실을 개설하는 등 계파 결속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단순히 한보 스캔들이나 이른바 ‘음모세력’에 대한 방어 차원이 아니라 `‘제3의 대 안 모색’ 등 적극적인 공세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계가 애초 6월 초에나 집단적 의사표명을 하겠다고 밝혀왔던 것에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셈이다.

민주계가 한보사태라는 계보 괴멸의 위기를 맞아 적어도 외부적으로나마 힘을 모을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지적된다. 고위당직을 지낸 한 중진의원 은 “최형우 고문도 미리 발톱을 감출 필요가 없어 대선주자를 자임했지 만 어느 순간에는 한군데로 힘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최 고 문의 와병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DR(김덕룡 의원)이 이번 `‘한보리스 트’ 파문으로 결정타를 맞은 게 (민주계 결속에) 오히려 도움이 된 측면 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정치권 관계자들은 김 의원이 적어도 당분간은 대권포기 선언 등 자 신의 정치적 생명을 단축시킬 자충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김 의원이 한보리스트 연루 의혹 이후 민주계 중진들에게 “(계보 ) 전체의 뜻에 따르겠다”고 약속한 바 있어 민주계 전체의 행보에 탄력 성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은 적지않다.

민주계가 이렇게 정리될 경우 김 대통령의 선택 폭이 넓어지게 된다는 분 석도 일반적이다. 한 관계자는 나아가 “김 대통령의 의중이 민주계 이외 의 의원들에게도 일정한 가이드 라인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 의원들이 총재인 현 대통령의 의중을 따르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시월회도 ‘정치적 중립’천명

이와 관련해 당내에서는 이회창 대표가 집단적으로 자신을 겨냥한 민주계 의 반발이 본격화되던 지난 4월12일 김 대통령을 만나 민주계 달래기와 당 수습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대목에 주목하는 시각도 적지않다. 이 대표가 사실상 김 대통령의 현실적 힘을 인정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김심’ 못지않게 `‘당심’도 애초 예상과는 다른 방향의 변화를 보이 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대표 취임 직후의 예상과는 달리 의원들 이 이 대표에게 눈에 띄게 줄을 서지 않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고 지 적했다. `‘이회창 대세론’이 예상외로 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로 이 대표쪽도 이런 분위기에 적잖게 당황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중진의원은 “지금 의원들의 90% 이상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혼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국상황에 대한 더듬이가 작동되지 않자 일단 몸 을 움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진은 그 이유에 대해 “이 대표의 당 장악력이나 정국을 풀어가는 솜씨가 기대 이하이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당분간 다른 대선주자들이 ‘열중쉬엇’ 자세로 견제다운 견제를 못하 게 돼있는데도 이 대표가 기회를 못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의원들이 그 때문에 `이회창이 아니라면 마당발 이수성이 아니겠느냐’ 고 쑥덕대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정계 출신의 한 고위당직자도 이런 분석에 동조하고 있다. 그는 “최종 승자가 누가 되든 (당이나 의원들은) 그 결정에 승복할 것”이라고 강조 했다. 이 대표 지지 입장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는 김윤환 고문 계열로 분류되는 몇몇 민정계 중진 의원들도 “김 고문이 너무 정치기술쪽으로 치중하고 있어 위험한 것아니냐”고 말하는 등 일정하게 거리를 두려 하 고 있다. 적어도 당내에서는 `아직 줄을 서기에는 이르다’는 기류가 다 시 팽배해진 셈이다.

초선의원 모임인 `‘시월회’가 3월12일 “본격적인 경선국면에 들어갈 때까지 대선 예비주자들의 각종 공사석 모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 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하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바닥은 조용하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이런 구도가 결국 이 대표의 대세론과 민주계의 결속 을 양축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홍구·박찬종·이수성 고 문 등에 이어 이한동 고문까지 민주계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는 등 ` ‘민주계 마음잡기’에 나서고 있는 양상도 이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반 면 이 대표쪽도 12일 김 대통령과의 독대를 계기로 `‘당 수습’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있어 세불리기를 통한 정면대결 양상이 벌어 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바닥은 조용하다”고 잘라 말했다. 성층권에 서의 다툼과는 별개로 일반 당원이나 국민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할 뿐이 라는 것이다.

여현호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