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민주계, 보스에 배신당하는가

(사진/`불편한 동지'. 서석재 의원이 주축이 된 `민주화세력모임'과 김덕룡 의원간의 내부 갈등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계가 최악의 덫에 허우적대고 있다.

검찰의 한보 수사가 계속되면서 민주계가 소멸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 속에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구심점도 형성하지 못한 채 그나마 남아있던 유일한 대선주자인 김덕룡 의원마저 한보 수사로 휘청거리고 있다.

음모의 배후, 당 지도부 겨냥

김 의원은 한때 검찰 소환에 불응한 채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자신 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검찰 조사 결과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명인 이두룡 서초문화원 부원장이 한보 돈 5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심대 한 정치적 상처를 입었다.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나의 결백이 증 명됐다”고 한 그의 말로 인해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정치 지도자의 올 바른 자세가 아니다”는 지탄을 받았다. 측근이 받았다고 해서 그의 책임 이 면해지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두차례에 걸친 검찰 조사가 진행됐는 데도 자기 진영 내부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도 김 의원의 정치력을 반영한다는 지적이다.

또 최형우 의원의 뇌졸중 입원 이후 민주계의 새로운 좌장으로 떠오른 서 석재 의원도 한보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김수한 국회의장의 이름 도 떠돈다. 한마디로 민주계가 풍비박산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감 속에 민주계가 취한 대응이다. 이들은 한보 리스트 에 대한 검찰의 재조사가 착수된 이래 연일 각종 모임을 갖고 `민주계에 대한 ‘고사작전’이라며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왜 우리의 이름만 나오느냐”면서 “틀림없이 어떤 음모에 따라 수사가 진행되고 있 다”고 주장했다. 집권세력이면서도 한솥밥을 먹는 검찰의 수사를 `‘음 모’로 지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음모의 배후에는 이 대표와 김윤환 전 대표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부적 으로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이 대표쪽은 “이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도 리스트에 있는데 음모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으며, 김 전 대표쪽 도 “우리가 음모를 할 수 있는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계의 음모론은 특별한 실체가 없음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들 이 음모론의 배후 중 한명으로 내부적으로 지목했던 TK의 대부 김윤환 의 원도 한보 리스트에 올라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덕 룡 의원은 지난 4월14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출 인허가 배후 등에 집중 해야 하는 검찰 수사의 본말이 전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큰 흐 름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여전히 음모론을 제기했다.

민주계가 제기한 음모론의 공격대상이 김윤환 의원이나 그와 연계됐다고 주장하는 이회창 대표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 민주계가 이회창 대표를 겨냥하는 것 같지만, 이 대표의 경우 팔짱을 끼 고 가만히 있는 데 대한 얄미운 감정 정도이지 음모의 배후로까지 보는 것 같지는 않다”며 “오히려 대표보다 더 고위에 있는 당 지도부를 겨냥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통령 각하 섭섭하외다”

실제로 민주계는 자신들의 보스인 김 대통령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 한 바 있다. 지난 4월11일과 12일 민주계 중진의원들의 잇단 모임에서는 “진짜 몸통은 어디 두고 우리만 갖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진짜 몸통이 누구를 의미하는 지는 분명하다. 김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 를 지목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민주계 인사들이 한보문제가 `‘본질이 아 닌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계의 한 소장 의원은 “배후가 있지 않고는 어떻게 김현철씨쪽으로 향하던 검찰수사의 흐름이 갑자기 정치인쪽으로 바뀔 수 있겠느냐”면서 “검찰이 몸통 수사가 미진 해서든 아니면 몸통수사를 전면적으로 할 생각이 없어서이든 수사의 성과 를 정치인쪽에서 찾으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현철씨를 살리기 위해 옛 동지를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는 의 구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김 대통령에 대한 공격인 셈이다.

특히 김덕룡 의원쪽은 김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공공연히 표출했 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차례 대신 감옥을 드나드는 등 평생을 바쳐 모셔 왔던 김 대통령이 김 의원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여권 핵심부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지난 11일 김 의원이 김기수 대통령 수행실장을 개인 사무실인 덕린재에서 만났을 때도 이러한 섭섭한 감정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끈끈한 동지적 관계 도 정치적 생명이 걸린 현실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주계의 탈출구가 과연 어디에 있을지는 아직 예측하기 쉽지 않다. 그러 나 대선주자인 김덕룡 의원의 행보가 여권 내 최대 계파인 민주계의 선택 에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하다. 한보로 상처받은 그가 끝까지 `‘마이웨 이’를 선택하느냐 아니냐가 주요한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김덕룡 의원은 검찰 조사를 받은 이후인 14일 기자회견에서 경선 출마 여 부에 대해서는 “대권은 개인적인 욕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 “국 민여론과 자문단의 의견을 들은 뒤 추후 입장을 밝히겠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민주계로서는 김 대통령의 분신이었던 김 의원의 독자행보를 나 몰라라 방관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끝까지 지켜주고 밀어주기도 힘든 곤혹스 런 처지에 있다. 민주계의 한 소장의원은 “지금은 한보 수사로 인해 민 주계 전체가 일단 뭉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한보 사건이 종결되면 민 주계의 분화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며 “이는 김 의원이 아직 민주계의 최종 대안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은 “김 의원이 계속 출마를 고집하며 민주계에게 밀어달라고 요구할 경우 민주계가 단합 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누가 대표할 것인가

실제로 서석재 의원이 주축이 된 `‘민주화세력모임’과 김덕룡 의원간의 내부 갈등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쪽은 민주화세력모임의 전적인 지지를 요구하고 있지만, 민주화세력모임쪽은 자신들은 결코 특정 인에 대한 지지 단체가 아니라면서 김 의원에 대해서 우선 대중성을 높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민주계를 누가 대표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할 여지가 큰 것이다.

집권 세력인 민주계의 이러한 내연과 갈등이 어느 쪽으로 터지느냐에 따 라 여권 내 권력투쟁의 성격도 크게 달라질 것같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