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뒤틀리는 신한국, 대란 오는가

(사진/전혀 다른 두 모임. 4월12일 오전 이회창 대표는 맨하탄호텔에서 당내 중진을 초청해 조찬모임을 열었다(왼쪽).
같은 시각 63빌딩 한 식당에서는 민주계 원내외 거두들의 회동이 따로 열렸다.(오른쪽))

한보 추문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정치권을 뿌리채 뒤흔들고 있다. 특히 소 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는 여권은 음모설 및 역음모설 등을 둘러싸고 춘추 전국의 대란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날만 새면 서너명의 정치인이 `‘한보 돈’ 때문에 서초동 검찰청사의 현 관을 들어서고 있으나, 그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 33명에 그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최소 56명은 될 것이라거나 그보 다 훨씬 많다는 각종 설까지 난무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신한국당 소속, 특히 민주계다.

정치인의 처참한 몰골들

전체적으로 보아 검찰의 도마위에 올려진 정치인들은 질적인 면에서 더욱 가관이다. 김덕룡(신한국당) 김윤환(신한국당) 김상현(국민회의) 의원 등 차기 대선고지를 향해 뛰는 대선주자들을 비롯해 김용환(자민련) 박종웅( 신한국당) 이중재(민주당) 의원 등 여야 각당의 실세 의원들이 망라돼 있 다. 3김씨의 측근들도 고루 포진돼 있다.

게다가 이들의 한결같은 ‘오리발’ 행태는 자신은 물론 정치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검찰 출두 전까지 “한푼도 받 은 적이 없다” “한보 사람들을 알지도 못한다”고 당당히 맞섰던 이들 이 검찰 조사 뒤에는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심지어 “측근이 받았 기 때문에 나의 결백이 증명됐다”“5천만원 외에는 더 받은 것이 없어 나는 깨끗하다”는 궤변까지 늘어놨다.

3김 정치에 기생해온 이들의 구린 뒤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3김 청산론이 자연스럽게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3김 이후’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정치권의 혼란은 가닥 정리가 쉽 지 않을 것 같다.

한보가 초래한 정치권 대지진의 진원인 여권은 특히 더욱 공황상태에 빠 져 있다. 공멸의 위기 앞에서 당분간 물밑으로 잠복할 것으로 여겨졌던 여권내 세력다툼이 오히려 한보 청문회와 검찰 수사로 인해 급한 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싸움은 대선 주자간의 합종연횡이나 세 경쟁 등 통상적인 차원 의 힘겨루기 등 정상적인 게임이 아니라 정치세력간의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건곤일척의 `‘마지막 승부’로 치닫는 조짐조차 일고 있다.

지난 4월12일 오전 정치 중심인 여의도에서 펼쳐진 두개의 장면은 여권에 서 벌어지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한눈에 보여줬다. 여의도 광장 서쪽 맨하탄호텔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주재 당내 중진의원 조찬 모임이 열리고 있었던 시각, 광장 동편의 63빌딩 한 식당에서는 민주계 원내외 거두들의 회동이 따로 열렸다. 현재 여권 내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이 회창 대표와 당내 다수파인 민주계간의 대치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같은 시각 다른 장소 ‘중진의 회동’

이 대표 초청의 이날 조찬 모임에는 오세응 국회부의장과 신상우 해양수 산부 장관을 비롯해 서정화(서울 용산) 이세기 이해구 정재문 장영철 서 정화 박세직 김종하 김태호 의원 등이 참석했다. 한보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이에 대한 민주계의 반발 사태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민주계의 음모설에 대해 “검찰 수사를 둘러싼 음 모설은 가당치 않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같은 시각 민주계 모임의 분위기는 처음 입는 모시옷처럼 서걱거 리고 날카로웠다. 싸움터에 출진하기 직전의 전사들처럼 뭔가를 향한 적 개심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참석자는 김덕룡 의원을 비롯해 서석재 김명 윤 김정수 서청원 김운환 목요상 김동욱 김찬우 의원, 황명수 전 의원이 었다.

이들은 모임이 끝난 뒤 “이른바 한보리스트의 비정상적인 유출에 의해 정치권 전체가 무기력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집권여당이 이런 상황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함께 반성하고 앞으로 책임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표현은 절 제됐지만 당 지도부를 겨냥한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 뚜렷했다.

이날 비공개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에서는 “벌써 며칠 전부터 우리 모임이 예정돼 있었는데, 도대체 대표실에서 같은 시각에 갑자기 의원 모 임을 소집한 이유가 뭐냐” “민주계 모임을 깨려는 의도 아니냐”는 등 이 대표를 겨냥한 성토가 쏟아졌다. 특히 민주계 의원 모임에 오기로 돼 있던 신상우 장관과 정재문 의원이 이 대표와의 조찬 모임에 참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두 사람은 저쪽에 `‘투항’한 것 아니냐”며 두 의원 을 비난하는 말까지 서슴없이 터져나왔다. 두 의원은 이 대표 모임이 끝 난 뒤 부랴부랴 민주계 모임에 합류했다. 두 의원의 비서진은 민주계 동 료 비서진들에게 “63빌딩 모임을 착오로 연락받지 못해 이 대표 모임에 갔던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민주계 나름의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는 대 목이다.

민주계는 공격목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칼날이 겨냥하는 쪽은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이회창 대표였다.

민주계는 김덕룡 의원의 검찰 소환조사 전에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음 모론’을 제기하면서 그 음모를 꾸미는 주체가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물론 음모의 주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다.

그러나 민주계 인사들은 정치적 음모의 주체에 대해 `TK(대구 경북) 세력 을 중심으로 한 ‘보수 수구세력’이라고 거의 공공연하게 지목했다. 민 주계 중진의원의 한 측근은 “검찰이나 안기부 등 권력기관에 남아있는 T K 세력이 민주계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언론에 흘리고 있다”며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고 말했다.

TK 세력의 대부인 김윤환 고문과 이 대표의 정치적 커넥션이 음모의 뿌리 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계의 한 관계자는 “이 대표의 한 측근이 이 대표에게 `‘민주계는 머리만 자르면 붕괴된다’면서 민주계 와해 아 이디어를 제공한 것으로 안다”며 “지금 민주계 거목들이 속속 희생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분노를 삭이는 이회창

(사진/검찰조사를 받고 나온 뒤 김덕룡 의원의 4월14일 기자회견. 음모론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다.)

이 대표에 대한 민주계의 공격은 물밑에서만이 아니라 공개적으로도 진행 됐다. 김덕룡 의원과 가까운 이신범 의원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 이 의원 은 지난 4월10일 한보특위 위원직을 사퇴하면서 “검찰 일부와 당지도부 가 현재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노골적으로 이 대표를 공격했다.

이튿날 열린 김덕룡 서석재 김명윤 김정수 서청원 의원 등 중진 5인 모임 에서는 좀더 명시적으로 이 대표에게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검찰의 `‘ 표적수사’도 문제지만 당 지도부의 미온적인 대처가 더 큰 문제라며 이 대표를 비난했다. “당이 당원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현상황을 계속 방치하는 것은 엄연한 책임회피”라고 주장했다. 이는 이 대표에 대 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비쳐졌다.

사실 김덕룡 의원쪽은 이 대표에 대한 전면전을 한때 고려했던 것으로 알 려졌다. 선두주자인 이 대표와 전면전을 벌임으로써 지리멸렬해가는 민주 계를 한 울타리로 묶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김 의원이 민주계의 대표 주자로서의 확고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대표쪽은 이에 대해 “지나친 오해”라고 해명하면서도 일체의 공개적 인 맞대응은 하지 않고 있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민주계의 의원 다수 가 한보 리스트에 올라 있는 등으로 인해 그들이 느끼는 감정상태는 이해 가 가지만 이 대표를 음모의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민주계가 이 대표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흔들어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며 상당히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여 차하면 전면대응도 불사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가 민주계 의 음모론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가당치 않다”고 표현한 데서도 이러 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이 대표쪽의 시각은 민주계가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무슨 정치적 음모가 깔려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즉, 민주계가 `‘이 대표 흔들기’ 에 착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표쪽은 민주계가 이 대표의 낙마를 목 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질 경우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결의도 표시한다.

김윤환 고문쪽도 민주계의 공세적 자세에 긴장하면서 이 대표 지원 태세 를 갖추고 있다. 민주계가 자숙하기는커녕 당내 분파를 조장하는 당을 깨 자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민주계가 자신들이 처한 궁지 를 빠져나오기 위해 정치적 음모론을 주장하는 차원을 벗어나 `‘이 대표 쓰러뜨리기’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확인될 경우에는 주저없이 한판 붙 는다는 각오이다.

다수파인 민주계와 이 대표-민정계 연합세력간에 대결전을 벌이는 것 아 니냐는 위기감은 일단 이 대표가 민주계를 감싸안는 방향을 택함으로써 한발 늦춰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지난 4월12일 김 대통령에게 면담 을 요청해 정치인 수사의 조속한 종결을 요청하는 등 민주계의 불만을 무 마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통령과 회동한 뒤 민주계의 새로운 좌장으 로 떠오른 서석재 의원을 별도로 만나 김 대통령과의 회동 결과를 전하고 민주계의 일탈 방지를 요청했다.

한보수사 진행, 큰 변수

‘법대로’의 상징까지 이 대표가 이렇게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했지만 과 연 그의 정면충돌 회피 노력이 일정한 결실을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민주계가 이 대표에 대해 생래적이라고 할 만큼의 강한 거부감과 후환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마저 가지고 있는데다가 내부에는 다수 세력으로서 독 자적인 정권재창출을 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보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청문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양 쪽의 대결은 언제든지 폭발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