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여성칼럼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왜 여성의 사랑은 용서받지 못하는가

양창순

신경과, 정신과 전문의. 서울백제병원 부원장 및 연세대학교 정신과 외래 부교수
저서에 `이젠, 부모노릇 신나게 합시다' `표현하는 여자가 아름답다'
`남 자를 알아야 사랑이 자유롭다', 역서로 `나보다 더 아픈 그대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사람의 명성만큼 쉽게 허물어 지는 것도 없는 듯하다. 특히 살아생전 유명했던 사람일수록 죽고나서 극 심한 훼예포폄을 거치는 것이 세상살이이다. 지금 프랑스에서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 지경에 처해있다는 보도가 분분하다.

`제2의 성'을 통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며 여 성의 정신적 해방과 주체성 확립을 주장했던 그녀가 알고보니 ‘순종적인 아랍여성’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그녀가 거의 20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미국의 소설가 넬슨 앨그랜 에게 쓴 ‘낯뜨겁고 원색적인’사랑의 편지가 출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 다.

훌륭한 남자가 사는 건강하고 찬란한 궁전을 위해 하수구 역할을 도맡는 것은 창부뿐 아니라 여성 전체라고 주장한 그녀가 정작 남자에게 ‘당신 을 위해 빨래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것이며 만일 원하지 않으면 손도 어깨도 잡지 않겠다’고 애원하며 하수구 역할 을 자청하고 있으니 프랑스 사람들이 화가 날 만도 하다.

보부아르가 넬슨 앨그랜을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첫 미국여행 때 친구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두 사람의 무겁고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는 그녀가 19 54년에 발표해 그해 공쿠르 상을 받은 소설 `레 망다랭'에 절절하고도 자 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소 현학적인 지식인 세계를 날카롭게 묘사한 `레 망다랭'은 사르트르와 카뮈 그리고 보부아르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로 유명하지만 보부아르로서 는 넬슨 앨그랜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좀더 개인 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는 못했다.

어쨌든 여성해방운동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의 한 사람이었던 그녀 역시 사랑 앞에서는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는 것은 분명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인간 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거기에 여자와 남자라는 구분이 있을 수 없 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사랑의 갈구와 의존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보부아르 역시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해서 그녀 를 비난할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생동안 질긴(?) 바람둥이었던 사르트르는 일흔이 넘어서도 스물도 안 된 나이 어린 여학생과 정기적인 밀회를 가졌다. 그 사실이 보도됐을 때 도 프랑스는 술렁거렸지만 배신 운운하는 비난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보부아르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남자에게 애절하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해서 ‘순종적인 아랍여성’으로 급전직하 매도된다는 것은 좀 심 한 대접이다. 어느 사회나 여성에게는 너그럽지 않은 것일까. 단지 그녀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사랑과 감정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아 주면 그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부아르처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성도 사랑 앞에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맹목이었다는 사실도 세상살이의 희화적인 반전을 보는 것 같아 유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