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잠든 공룡, 공기업을 깨워라

(사진/3월26일 열린 한국개발연구원의 공기업 경영효율화 및 민영화 방안 토론회. 재벌의 소유집중을 막기 위해 1인당 지분소유한도를 제한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의 서비스를 생산하는 정부를 원한 다. 우리는 세금납부자를 고객처럼 대접하고 납세자가 낸 세금 한푼 한푼 을 그들이 그 돈을 벌기 위해 쏟은 땀과 희생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사용 하는 정부를 원하다.”

정부개혁 작업을 진행중인 미국의 앨 고어 부통령의 말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3월26일 발표한 공기업 경영효율화 및 민영 화 방안을 통해 담배인삼공사, 가스공사,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등 4대 공기업의 민영화 방향을 소유분산과 전문경영인체제 도입을 통한 경영효 율성 제고로 제시했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공기업 민영화를 가속화하기 위한 밑그림인 셈이다. 여기에 이들 거대 공기업을 시작으로 경쟁원칙의 불모지인 정부부문을 혁신시키기 위한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공기업 국내총생산 점유율 8%~9%대

지난해말 현재 정부투자기관(정부지분 50% 이상)과 정부출자기관, 정부투 자기관 출자회사를 포함한 전체 공기업은 1백20개사에 이른다. 이들의 연 간 예산규모는 1백9조원, 종사자는 30여만명. 부가가치총액으로는 국내총 생산(GDP)의 8~9%를 점할 정도로 국가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기 업의 대부분은 민간의 자본과 경영 능력이 취약했던 상황에서 정부가 경 제활동 전반을 주도했던 경제발전 초기단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한때 고 도성장을 뒷받침하며 효자노릇을 했던 이들은 경제여건의 변화 속에서 경 쟁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는 액물 덩어리로 전락했 다.

공기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정부부문의 생산성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낮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최근 발표한 올해 기준 국가 경쟁력 평가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정부는 평가대상 46개국 가운데 36위 로 중국, 타이, 필리핀보다도 낮은 최하위권에 처져 있다. 정부부문를 포 함해 금융산업, 국제화 수준 등 8개 평가항목을 망라한 우리나라 전체 경 쟁력 순위(31위)에 비해서도 낮다.

개방화, 국제화 추세 속에서 철저한 이윤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민간기업 에 비해 공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 다. 국내시장에서 누려온 독점적 지위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국책연 구소의 한 관계자는 “주무부처의 퇴직공무원, 심지어 전혀 실무경험이 없는 정당이나 군출신 인사들이 대통령의 정치적 배려에 의해 능력에 대 한 검증도 없이 낙하산식으로 최고경영자에 임명됐다가 철새처럼 떠나는 현실에서 공기업의 경쟁력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찾기”라고 꼬 집는다.

그러나 무한경쟁시대에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쟁력 제고뿐 아니라 정부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공공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당면과제로 꼽힌다. 때문에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공무원은 왜 수입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 있다.

공기업 민영화 재벌 덫에 걸려 지지부진

김영삼 정부는 집권 첫해인 93년 말 58개 공기업의 정부지분을 매각하고 10개사는 통폐합하는 내용의 공기업 민영화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난 해 말까지 지분매각이 이루어진 공기업은 22개사(16개사는 매각 완료)에 불과하다. 통폐합도 5개사에 그쳐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공기업 민영화 가 정부보유주식의 완전매각을 통한 민간소유화로 추진되면서 공기업 인 수를 통한 재벌의 경제력집중이라는 덫에 걸린 것이다. 한국중공업 같은 거대기업을 특정재벌에 넘길 경우 특혜시비가 빚어지고 그렇다고 재벌그 룹 아니고는 인수할만한 민간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때마침 불어닥친 증 시침체로 인한 지분매각 부진도 한 요인이다. 급기야 김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공기업의 민영화=민간소유화’라는 기존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대 한 전면 재검토 지시를 내렸다. 재정경제원의 연구용역 결과로 나온 이번 KDI 방안은 그 결과물인 셈이다.

KDI 방안의 골자는 첫째 특혜시비가 적은 중소규모의 공기업 등은 종전 계획대로 지분매각을 계속하되 그동안 민영화의 상징처럼 여겨져왔던 4대 공기업은 1인당 지분소유한도를 3%, 5% 또는 10%로 제한해 주식분산을 유 도함으로서 특정재벌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정 부의 간섭을 없애면서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해 자율 및 책임경영이 가능 토록 함으로써 경영효율을 높인다는 구상이다(표 참조). KDI는 이를 위해 4대 공기업의 최고경영자(사장)는 이사회(사내이사는 제외)에서 외부공채 나 영입방식으로 후보자를 선정해 주총에서 선출하고, 상법에 보장된 3년 임기중에는 이사의무 위반, 현저한 경영성과 부진 등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해임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 주무부처의 업무감독권은 물론 감사원 감사, 국정감사 등 사후감사까지 대폭 축소하고 그동안 말썽 많던 이사장직을 없앰으로써 외부 입김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재경원은 이달중 공청회를 거쳐 정부안을 확정한 뒤 상반기안에 공기업 민영화 및 경영구조 개선에 관한 특별법(가칭)을 제정해 올 하반기중부터 시행할 방 침이다. 재경원 실무담당자는 “정부 보유지분 매각 전이라도 최고경영 자가 자율적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아예 특별법에 못박을 방침”이라면서 “정부 의지는 확고하다”고 강조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정부의 방침이 최근 한보와 삼미그룹의 잇단 부도로 재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재벌신화가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오너(소유주)의 절대권력과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및 출자를 통 한 문어발식 사업다각화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고 있는 재벌그룹들은 그동 안 정부의 소유분산과 소유-경영 분리를 통한 전문경영인체제 도입 주장 에 코웃음을 쳐왔다.

주인없는 공기업 효율성 확보는 불가능?

물론 정부의 구상이 공기업의 경영혁신으로 이어질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문제다. “주인없는 공기업이 경영효율성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재벌 그룹의 냉소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풍토상 공기업이 정부의 입김에서 벗어 나 자율경영, 책임경영을 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 다. 단적인 예로 은행의 경우 산업자본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에 따라 비상임이사회에 5대그룹의 참여를 배제한 결과 대부분 능력이나 경영실적과는 관계없이 사내 인사들이 나눠먹기식으로 행장이 선임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장 추천권을 갖게 될 사외이사들이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사를 소신대 로 고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사외이사는 초대에는 관계부처나 업계, 학계 등 전문가로 구성된 공기업사외이사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 뒤 주총 에서 선임하고, 2대부터는 정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구성하도록 돼 있 다. 재경원은 비상임이사 10명의 추천권을 정부(3명), 산업은행(1명), 주 식지분 1%를 초과하는 4명의 대주주(4명), 우리사주조합(1명), 외국인주 주대표(1명)로 정해 놓은 포철의 정관을 참고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의 입김 아래 놓여 있는 추천권자가 절반 가까이에 달하고 나머 지는 단합된 의견을 내기가 어려운 구조여서 역시 정부가 사장 결정권의 열쇠를 쥘 가능성이 높다.

자율성과 함께 전문경영인체제의 성패를 가늠하는 또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에 대한 평가와 책임부문에도 걸림돌이 있다. 정부는 이 사회의 경영목표 설정과 경영실적 평가에 따라 사장에 대한 평가를 내린 다는 계획이지만 합리적인 목표 설정과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지는 미지 수다. 전화, 가스요금 등 이들 공기업의 경영실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 는 요소들이 정부의 물가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현실은 당분간 달라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쟁체제 도입은 산업정책에 맡긴다

결국 이들 공기업이 상당부분 시장경쟁체제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최고경 영자에 대한 경영평가가 많은 한계를 지닐수밖에 없다. 재경원의 한 관계 자는 “민영화의 3대 초점인 정부주식 매각, 자율경영 보장, 경쟁체제 도입 가운데 마지막 경쟁도입 부분은 일단 산업정책에 맡기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정부의 이번 방안은 초보적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하다. KDI의 이계식 박사는 “4대 공기업 외에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사업부서화할 수 있는 부 문, 각종 공사, 관변협회 등을 포함하는 좀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정부혁 신이 추진돼야 한다”면서 “이번 정부 조처는 근본적인 정부혁신으로 가기 위한 첫발”이라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