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민주노총, 정치세력화 선언

(사진/`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개혁정당' 건설을 승인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민주노총은 5월까지 `정치실천단' 핵심발기인 1천명을 모아 정당 건설 첫발을 내디딘다.)

“노동자가 중심이 돼 새로운 사회개혁정당을 만든다. 우선 내년 4월 지 방자치단체 선거에 후보를 대거 내세우고, 다음 총선에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한다.”

노동법 개정으로 합법화의 길을 걷게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위원장 권영길)이 이번에는 한국의 정치판의 지도를 바꿔놓을지도 모를 정치실험 에 나섰다. 독자정당 건설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재야와 시민·사회단체 폭넓게 결집

민주노총은 지난 3월27일 오후 서울 흑석동 원불교서울회관에서 임시대의 원대회를 열고 “98~99년 안으로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개혁정당’ 을 건설한다”는 중앙정치위원회의 사업계획안을 승인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도 이미 마련했다. 당장 4~5월중으로 당의 모태가 될 ‘정치실천단’ 핵심발기인 1천명을 모으고, 이어 연맹 및 지역본부별로 모두 1만여명을 꾸려 7월께 정치실천단 발기인대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배석범(52)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장은 “핵심발기인은 정당이 결성되면 당 장이라도 정치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라며 “따라 서 반드시 조합원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재야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을 폭넓게 결집하겠다는 것이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조만간 지역을 돌며 조합원들을 상대로 ‘정치학교’를 열어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 등을 교육하는 한편, 교수·변호사 등 전문가들로 자문위원단도 구성할 계획이다. 또 대국민 설문조사를 주기적 으로 실시하고, 전 조합원의 주소록을 전산화하는 작업도 벌인다. 본격적 인 정치활동에 대비한 포석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올 12월 대선에 앞서 정당을 결성하기는 다소 무리라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올 대선은 정치실천단 조직만으로 치른 뒤, 대선 결과에 따라 정당의 공식출범 시기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그 러나 늦어도 지자체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4월 안에는 정치실천단을 준정 당조직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민주노총의 정당건설 계획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관심의 초점은 자연스레 새로 건설될 정당의 정강·정책에 쏠리고 있다.

배 위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 개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사회주의 를 진보와 일치시키는 태도는 잘못됐다”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느 쪽이든 장점이 있다면 과감히 접목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새 정당의 이념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에 가 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고위 간부들도 “정당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물음 에 한결같이 “‘노동’이나 ‘노동자’라는 말이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 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당=사회주의정당’이라는 인식 때문에 부 담스럽다는 것이다.

“정치권에 기대할 것 없다” 독자후보론에 무게

물론 새 정당의 이런 이념적 지향은 조만간 ‘범운동권’에서 한바탕 논 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이 정치실천단의 조직 과정에서 부터 이념을 크게 달리하는 세력들의 진입을 아예 차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정당건설 추진계획과 관련한 최대관심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올 연말의 대선에 어떤 영향를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민주노총은 아직까지는 “야권 단일후보와 정책연합을 하거나 독자후보를 낸다”는 원칙만 세운 채, 최종결정시기는 7월께로 늦춰잡고 있다. 대선 을 앞두고 정치권의 광범위한 재편이 예상되는 만큼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의 기류는 이미 독자후보 출마 쪽으로 상당히 기 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JP연합이 가능하더라도 승리 가능성이 그다 지 크지 않고, 더욱이 이 연합이 정권창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사회개혁 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이 다.

중앙정치위원회는 이와 관련해 정책연합의 조건으로 “수평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검증되고, 단일후보가 노동법 재개정과 함께 민주노총쪽이 추천 하는 인물을 내각에 일부 기용한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 한 상태다.

권영길 위원장도 최근 “대선에 출마할 것이냐”는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 은 피한 채, “우리나라에서 20년 이내에 진보적 정당이 실제 국가권력을 획득하는데 미력이나마 역할을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해 조직적 결의 가 있을 경우 출마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권 위원장이 후보로 나섰다가 기대한만큼 표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독자적 정치세력화 일정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 려도 적지 않다. 실제 투표에서는 유권자들의 사표방지심리가 크게 작용 한다는 역대 선거의 경험은 그 근거가 되고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그러나 “지난 1월 한달간의 총파업을 통해 민주노 총이 합리적 대안세력으로 인식되고, 권 위원장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가 있는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또 정권교체의 가능 성이 없다면 야권성향 유권자의 선택도 자유로와질 것으로 내다본다. 권 위원장이 한동안 공석중이던 수석부위원장에 최근 독자후보론의 주창자인 배석범 위원장을 지명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민주노총 자체가 차기 대선의 변수

비록 민주노총이 아직 대선방침을 최종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50만 조합 원과 1만명의 정치실천단을 등에 전위로 한 정당결성을 추진하는 것 자체 만으로도 대선판도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6·10 민주항쟁 10주년을 맞은 올해, 6·10항쟁을 젖줄로 자라난 민주노 총이 그동안 현실정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정치세력화에 번번이 좌절하 고만 진보세력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한국정치판의 물줄기를 바 꿔놓는 계기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