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한총련, 다시 변혁의 깃발을 올린다

(사진/3월29일 거리에 나선 학생들. 김영삼 정권의 임기 내 조기퇴진을 관철시키겠다는 주장이다.)

86년 건대사태를 지켜본 사람들치고 바로 그 학생들이 87년 6월항쟁을 이 끌 것으로 예측한 이는 드물 것이다. 86년 당시 ‘친북노선의 급진좌경학 생’ 1천2백여명은 기네스북의 단일사건 최대구속자수를 경신했다.

마찬가지로 96년 ‘친북노선의 급진좌경학생’ 6천여명이 연행된 한총련 사태를 보고 97년 학생운동의 화려한 재기를 예상하는 이는 거의 드물다. 대학가의 분위기는 그러나 예사롭지 않다. 87년에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의 죽음이 있었다면, 지난 3월20일에는 조선대 학생 류재을(20·행정2)씨가 시위 도중 쓰러져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87년처럼 97년에도 대통령선거가 있다.

4월19일 이후를 기대하라

지난해말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처리는 깊숙이 침체돼 있던 학생운동 권에 자신감을 안겨줬다. 학생운동이 김영삼 정권을 일찌감치 ‘퇴진’과 ‘타도’의 대상이라고 주장한 것이 허무맹랑한 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해 들어 연일 터지는 한보비리와 김 현철씨 의혹정국은 대규모 반정부 거리시위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대학가는 술렁일 뿐 아직 조용한 편이다. 이를 두고 학생회 간부 들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 평가한다. 파문이 밀려들기만을 기다리는 호숫가라고도 표현했다.

‘각오하라’‘심판하자’의 구호가 ‘타도하자’ ‘퇴진하라’로 정리되 면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임시의장 강위원)은 최근 김 대통령 의 ‘임기 내 조기퇴진’을 투쟁의 실제적인 목표라고 공표했다. 지난해 당한 데 대한 분풀이의 냄새도 묻어나긴 하지만 최근 확인된 각종 파국적 실정의 응당한 대가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 3월28일과 29일 이틀 동안 각 대학별로 이뤄진 김 대통령에 대한 불 신임투표와 동맹휴업은 ‘조기퇴진’ 투쟁이 얼마나 가시화할지에 대한 잣대가 됐다. 이번 투표에는 1백여개 대학 가운데 70개 대학이 조직적으 로 참여했다. 찬반표를 던진 학생은 전체 70여만명 중 13만여명으로 투표 율은 저조했지만 투표자의 80% 이상은 불신임에 지지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총련의 한 간부는 이런 결과에 대해 “개학을 하고 한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의 투표율이면 그렇게 실망스런 수준은 아니다. 총학생 회 선거 투표율도 50% 안팎 아니냐”고 말했다. 한총련이 지난해 입은 운 동 역량의 손실에 비춰볼 때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는 게 이들의 평가다.

한총련은 특히 부산지역의 투표율과 불신임률을 강조한다. 김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부산에서 8개 대학이 동맹휴업에 나서고 불신임 투쟁 을 주도해 정권의 한계상황을 잘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총련은 대규모 집중투쟁이 1차적으로 모이는 시기를 4월19일께로 잡고 있다. 이때를 맞춰 노동자, 철거민, 도시빈민이 함께 참여하는 민중대회 를 열 계획이다. 한총련은 4월에 이어 5월18일과 6월10일께에도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연속적인 총궐기로 조기퇴진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

20여개 대학탈퇴에 외부세력 개입의혹

(사진/전남대에 마련된 류재을씨 빈소. 학생들은 류씨가 3월20일 시위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총련 주류의 투쟁계획과는 달리 학생운동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 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지 않다. 먼저 학생운동권에 대한 여론의 기피정 서가 여전히 광범위하고 이들에 대한 정권의 공세는 더욱 집요하다. 공세 의 방식과 정도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만 해도 덕성여대와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이미 구속됐다. 총학생회는 출범식 도 못하고 학생회장을 뺏긴 셈이다. 지난해 연세대에 들어갔다 훈방으로 풀려나온 6천여명은 올해 보안수사대에 줄줄이 소환되고 있다. 소환당한 학생들은 집안문제에 얽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외부의 탄압과 함께 학생 내부의 비판도 적지 않다. 먼저 비운동권 학생 회의 한총련 연속 탈퇴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미 20여개 대학이 탈퇴했다 . 학생운동의 큰 흐름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대학들이긴 하지만 일단 보 수언론에 편승해 여론에 일정 정도 호소력을 보여줬다. 이들 비운동권 총 학생회들은 “현재 학생운동의 대표성을 띤 한총련은 폭력시위와 정치투 쟁 일변도의 노선으로 변화하는 시대상황과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 했다”며 “한총련을 탈퇴해 대다수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건전한 비판 을 통한 연구 및 면학분위기 조성에 힘쓰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외부개입 의혹을 남기고 있다. 한총련 의 한 간부는 “목적의식이 투철하지 않고서는 이런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다. 학생운동권 안에서는 이것이 외부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는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라고 밝혔다. “탈퇴 선언 학교 중 6~7개는 한총련에 가입한 적이 없는 미가입학교들이다. 또 비운동권 총학생회들은 이전에도 한총련 분담금을 잘 내지 않았다. 결국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의 큰 흐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셈이다.” 이 간부의 분석이 다. 눈에 띄는 정황은 이런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있는 학교들에서조차 불 신임투표가 이뤄져 투표율은 낮았지만 높은 불신임률을 기록했다.

한총련사태를 학내에서 겪은 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등장한 연대의 경우 지난 3월27일 정문앞 시위 과정에서 총학생회쪽이 ‘인간띠잇기’로 시위 학생들의 학교밖 진출을 방해했다가 다수 학생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것 으로 알려졌다.

비운동권의 활동보다 한총련을 실제로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학생운동권 내부의 분열이다. 한총련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민족해방(NL)계열 의 내부분열은 서총련의장 선거에 제각각 후보를 내는 상황으로까지 발전 했다. 지난 95년 통일운동 방법을 둘러싸고 분열을 시작한 두 그룹은 각 각 ‘자주대오’와 ‘사람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차이를 보여오다가 지난해 연대사태로 결정적인 분열의 상황을 맞게 됐다. 그 여파로 지난 3 월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가 의장을 선출하지 못하고 연기되는가 하면, 서총련 의장을 선출하는 서총련 대의원대회에서는 민족해방계열 후보끼리 경선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총련의 한 간부는 “동맹 휴업과 총궐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이견이 나왔지만 총궐기 를 이뤄냈다.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부재와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지역운동 의 풍토도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상층의 논의보다는 대중투쟁의 장에서 합의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총련, 대중화로 일반학생과 거리 좁힌다

(사진/투표참가 학생 80% 이상이 찬성표를 던진 김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투표 비리와 의혹정국은 대규모 반정부 거리시위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학생운동 내부문제와 함께 학생운동이 해를 거듭할수록 고민하는 부분은 학생회와 학생운동의 대중화 문제다. 학생들이 참여하지 않는 학생운동은 더이상 학생운동일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특히 90학번 이후 세대들 은 개인주의에 익숙해져 있어 학생회가 벌이는 사업에 참여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의식은 넘쳐 흐르는데 행동은 하지 않는, 머리만 커져버린 신입생들이 들어온다”는 게 한 관계자의 고백이다. 이들을 80년대와 똑같은 방식으 로 이끌려 하다보니 떨어져 나간다는 반성도 있다.

따라서 올해도 한총련의 가장 큰 조직적 목표는 학생회의 대중화다. 학생 회 활동을 정치투쟁 일변도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학습, 생활, 투쟁의 공동체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올해 한총련 임시의장 선출은 이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 한총련 의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강위원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지난해 전남대 국문학과의 학생회장이었다. 과학생회장이 바로 총학생회장과 한총련 의장을 맡게 되는 것은 유례가 없다. 지역적 고려와 정치적 판단을 통해 의장을 선출했던 한총련의 관행이 뒤집힌 셈 이다.

그의 임시의장 선출은 전남대 국문학과의 학생회 활동이 모범적인 것으로 인정받은 데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예를 들어 농촌활동을 벌이는 학생 이 소수라면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고아원을 방문시키는 활동 따위를 마련하므로써 학생들의 참여를 극적으로 높였다는 것이다. “경쟁만이 삶의 유일한 가치가 돼버린 이 시대에 나눔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조국과 민중과 진보와 통일을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되어야 한다.” 강위원 임시의장은 이런 신념으로 총학생회에 ‘이웃사랑 뱅크’를 마련했다. 백반 한끼 값인 1천원으로 따 뜻한 이웃사랑을 실천해보자는 뜻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1천5백만원을 모 았다. 이 돈은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사회단체를 위해 쓰인다고 한 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과학생회장 활동론’을 직접 써 통신에 띄우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총련이 정말 변하는 것이냐”라는 반응까지 잇따르고 있다 . 한총련과 학생회의 개혁과 혁신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총련의 혁신과 관련해 좌파 또는 민중민주(PD)계열로 불리는 학생운동 권은 “한총련의 친북적 통일운동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다양한 부문운 동을 통한 학생운동의 다양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4월4일 열 리는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의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한국대학교육 연구소의 전동환 연구실장은 “학생회 간부들의 혁신과 함께 유명무실한 지구총련을 없애는 등의 조직집중화를 통한 조직개편과 의사결정구조의 민주주의성 강화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중진영의 외면도 무거운 짐

한총련은 지금 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한총련이 내부의 조직적 과제와 정치적 목표 모두를 이룰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제2 의 6월항쟁’을 만들어내겠다는 한총련 주류의 생각이 현실화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선배 세대들은 지적한다. 먼저 87년 6월항쟁 처럼 단일한 전선이 형성돼야 한다. 그런데 전국연합이나 민주노총 등 민 중진영은 한총련의 대규모 대중투쟁 방침에 전적인 공감을 보내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합법정당 건설을 통한 정치세력화에 무게를 두고 있는 실정 이다. 학생들로부터 타격의 대상이 될 정도로 보수화된 야당 또한 학생운 동이 견인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어쨌든 상반기 대중투쟁의 수준은 앞으 로 한총련 중심의 학생운동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의 잣 대가 될 전망이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