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프랑스 여성의 정치적 불평등

(사진/정부 내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남녀 동수의 국회를 만들자.”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서 최근 ‘여성의원 할당제’로 논란을 빚고 있 다. 국회의원 여성할당제란 ‘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국회에서도 일정비율 이상의 대표권을 행사하도록 보장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논쟁은 지난 3월초 쥐페 총리의 총리실 산하 여성평등문제위원회가 그 간 논의되던 ‘여성할당제 연구성과’를 모아 보고서 형식의 제안서를 제 출하면서 본격화됐다. 때마침 지난 3월8일 파리에서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실질적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터라 이 보고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남달랐다.

사회당, 총선서 여성 30% 공천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할당제는 이미 고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집권 말 기 당시 사회당 당수였던 미셸 로카르에 의해 주창된 바 있다. 그는 지난 93년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 때 여성후보 할당율을 50 %로 하자는 혁신적인 제안을 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당론으로 반영되 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리오넬 조스팽 당수 체제의 현 사회당에 서 다시 되살아났다. 조스팽 당수는 이미 오는 98년 총선거 때 사회당 후 보 중 여성후보를 30% 이상 의무적으로 공천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

보고서 발표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여성할당제 문제는 지난 3월11일부터 국회로 논의의 장을 옮겼다. 국회토론회에서 전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 는 헌법 개정을 통해 모든 선거에서 여성할당제를 입법화하자고 주장했고 , 현 쥐페 총리도 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10년 시한으로 ‘정치적 남녀동수 규정’을 헌법에 명문화할 의향도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프랑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프랑스’에서 새삼스럽 게 여성할당제 논의가 나오고 있는 데 의문을 던질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는 남녀 평등이 가장 철저한 나라로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1프랑, 2프랑, 5프랑짜리 동전 뒷면에는 ‘자유의 씨’를 뿌리 는 여인상이 있다. 또 1상팀(1프랑은 1백상팀) 주화에도 한 여인의 옆모 습이 새겨져 있다. 바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인 마리안느다. 어릴 때 미 술책에서 많이 봤던 저 유명한 화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등장하는 여인이 바로 마리안느다.

인류 최대의 보고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이 그림은 젖가슴을 드러 내놓은 채 한손에는 프랑스국기인 삼색기를, 다른 한손에는 총을 들고 혁 명군중을 이끌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또 작자 들라크루아 의 초상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1백프랑짜리 지폐의 앞면 에도 실려 있다. ‘삼색기, 자유, 평등, 박애’와 함께 자유를 이끄는 마 리안느가 당당히 프랑스를 이끄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프랑 스의 어느 관공서에서나 자유 프랑스를 상징하는 마리안느의 머리상이 놓 여 있다.

마리안느의 나라 프랑스는 여성스러운 우아함과 모성애적인 사랑이 듬뿍 한 나라이다. 프랑스어에서 프랑스는 ‘라 프랑스’로 여성형인 것도 우 연은 아닌 듯하다. 또 프랑스는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자유의 이념이 탄 생했던 나라이며 마찬가지로 남녀평등과 여성의 존엄성에 기반한 여성운 동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여성 사회활동 활발해도 우두머리는 남성

이런 프랑스에서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의 이념이 빛을 볼 수 있던 것은 어 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재 프랑스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여성의원 할당 제 논쟁이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논쟁이 바로 이런 여성해방의 원조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진보적 여성운동계는 여성해방과 관련된 프랑스의 명성 이 ‘빛좋은 개살구’라고 비판한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이 ‘존중 ’된다. 그러나 여성이 존중된다고 해서 남녀평등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여성은 여전히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영역에 머물러 있 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식과 현실의 차이’를 메 우기 위해 할당제가 꼭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 취업률이 80%선인 프랑스에서 관공서나 유치원, 초등학교를 메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하지만 이런 활발한 여성의 사회활동에도 위계질서의 최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남성이다. 시청의 공무 원들은 대부분 여성이지만 여성이 시장인 도시는 가뭄에 콩나듯하고, 중 고등학교에 여선생은 많지만 교장은 대부분 남자다.

이들은 나아가 이런 ‘여성차별’의 결정판이 바로 정치라고 강하게 비판 하고 있다. 유권자의 반이 여성인데 국회의 남녀성비를 보면 여성의원은 5.6%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권은 다른 어떤 곳보다 여성차별이 심한 셈 이다. 물론 영국 같은 이웃나라에서도 여성의원의 비율은 10%를 넘지 못 해 사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유럽국가 중에서 그리스를 제외하 면 국회 내 여성의원의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 이 점을 여성운동그룹 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국가의 경우는 여성의원이 국회의 과반수를 육박하고 있고, 여성 총리나 여성장관들도 빈번하다. 이에 비춰볼 때 프랑스는 분명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쥐페 총리의 “여성의원 할당제를 위한 헌번개정 수용 가능” 발 언이 나왔음에도 일부에서는 이 제도가 당장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예측은 현역의원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지난 3월8 일자 `르몽드'에 기초한 것이다.

`르몽드'는 5백76명의 의원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총 3백12명에게서 답 변을 받았다. 질의서는 3개의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살펴보면 첫째 , 국회 내 남성-여성 비율의 동등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자는 데 동의하는 가. 둘째, 선거후보 공천 때 여성후보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데 동의하는 가. 셋째, 만약 필요한 경우 남녀평등의 법 개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하자 는 데 동의하는가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20.26%가 찬성했고, 75.56%가 반대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38.91%가 ‘예’, 59.16%가 ‘아니오’라고 답했고,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16.40%만이 동의했다. 전체적으로 여성할당제 입법 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를 당별로 보면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 좌파정당 의원들이 긍정적인 반 응을 보인 데 비해 공화국연합(FPR)과 프랑스민주동맹(UDF) 등 현 집권당 의원들은 80%가량이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총선에서 우파의 압승 으로 현 프랑스 국회 하원에서의 우파 의원의 비율이 80%를 넘어서고 있 어 여성할당제가 현 국회에서 입법화할 가능성은 희박한 셈이다.

남성 정치인 기득권이 최대 장벽

유력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의 논설위원이며 저명한 정치학자인 올리비 에 뒤아멜도 자신의 논설에서 “현재 압도적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우파 집권당의 경우, 총선 때 여성후보 할당제를 도입하면 1백50명의 현 역의원들이 후보공천을 포기하고 여성후보에게 내줘야 하는데 과연 그것 이 가능하겠느냐”고 의문을 던진다. 바로 권력의 요직을 대량으로 차지 하고 있는 남성 정치인들의 기득권이 바로 여성할당제 도입의 최대 장벽 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당에서는 이미 내년 총선에서 30% 여성후보 할당을 공식화했 고 국민여론도 이 제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여성할당제는 먼 미래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내년 총선에서 만약 좌파가 승리한다면 입 법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의 여론조사는 내년 총선에서 사회당 승리를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올리비에 뒤아멜은 자신의 논설에서 진정한 여성의 권리 회복을 위해서는 법이 아닌 생활 속에서 여성할당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아래(정당)의 개혁없이 위(법·정부)만 변하는 것은 또다 시 ‘법률과 현실의 차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최연구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