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역사에 묻힌 ‘스위스 용병’

(사진/스위스의 고난사를 웅변해주는 사자기념상은 프랑스 루이 16세를 지키다 산화한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스위스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면 우리 머릿속엔 어김없이 아름다운 것들만 스쳐지나 간다. 하이디와 인자한 할아버지가 알프스 산자락에서 양들과 함께 살고 있는 곳, 요들송의 나라, 만년설과 푸른 목초지, 넓은 호수가 끝없이 펼쳐진 곳. 전쟁도 없고 평화만이 존재하는 영세중립국. 그래서인 지 한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1위는 항상 스위스 차지였다.

지난 3월20일 취리히 공항에 내리기 직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스위스는 산골짝 틈새에 자리잡은 작은 집들과 무엇을 심었는지 색깔마저 예쁜 반 듯한 농토와 산들, 그 사이로 구비구비 흐르는듯 펼쳐있는 호수 등 듣던 대로 목가적 분위기였다. 스위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촌스러움을 떨치지 못한 채, 취리히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관광도시 루체 른에 도착했다.

외침에 휘둘렸던 비극의 역사 희생자

루체른은 윌리엄 텔의 전설을 간직한 스위스 역사의 발상지로 18세기까지 스위스의 수도였다. 도시 앞에 만년설을 인 채 우뚝 솟은 알프스 아래 피 어 발트슈테터 호수가 누워 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1333) 가장 긴( 2백m) 나무다리인 지붕달린 카펠교(몇년 전 취객의 방화로 다리 일부가 불에 타 새로이 복구했다)가 로이스 강 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호수 반대방향으로 3백m쯤 올라가 도착한 사자기념비(Lowendenkmal) 앞. 거대한 암벽 속에 새겨진 사자석상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졌 다. 등에 박힌 칼이 몸을 뚫고 나와 숨을 거두기 직전의 이 사자는 눈을 감으면서도 창과 방패를 움켜진 채 마지막 포효를 준비하는 듯 왼발을 다 시 일으켜 세우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조차 미안했다.

이 사자상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 스위스의 고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스위스는 지리적으 로는 유럽의 중심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유럽사의 변방에서 수없는 외침에 휘둘려야만 했다. 게다가 험하기 그지없는 산세 탓으로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해 스위스인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스위스를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렀다. 가난했던 스위스의 유일한 자원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중세 이후 청년들은 외국으로 건너가 용병에 투신했다. 자신을 산 국가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다. 스위스 용병은 유럽 내에서 가장 용감한 군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외국으로 팔려간 스위스 용병의 수는 사병만 2백만명이었고 장군 도 7백명이나 됐다. 형제가 각기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 팔려 타국의 전장 에서 서로 칼부리를 겨누고 싸우기도 했던 비극의 역사를 지닌 나라가 바 로 스위스다.

루체른의 사자상은 프랑스대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호위병이었던 스위스 용병 7백68명을 기린 상이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난 뒤 파리 튈르리궁에 서 유배상태에 있던 루이 16세는 1792년 8월10일 탈출을 꾀하다 국민군과 민중시위대의 공격을 받는다.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던 병사들은 프랑스 병사와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외국의 용병들이었다. 시위대가 접근하자 외국 용병은 물론 프랑스 병사들도 대부분 도망가고 말았다. 루이 16세도 시위대가 접근하자 궁을 떠나 의회로 피신했다.

용병의 신의와 용맹 간직한 사자상

루이 16세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스위스 용병들을 불러 “너희는 프랑스 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당시 스위 스 용병을 지휘하던 12명의 스위스 장교들은 긴급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 지킨 신의는 끝까지 지킨다”는 말과 함께 만장일치로 결 사항전을 맹세한 뒤 전투에 나섰고 7백68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대포로 무 장한 시위대의 맹공에 장렬히 전사했다. 이 스위스 용병들을 기린 사자상 이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방패에는 바로 그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이 그려져 있다. 사자상 아래 놓인 연못은 그때 흘린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스위스는 1815년 독립 뒤 그 아팠던 과거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1821년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발슨에게 이 사자기념비 조각을 의뢰했다. 이곳은 스위스의 성지로 개가 들어올 수 없는 유일한 곳이다. 후대에 소설가 마 크 트웨인이 찾아와 “세계에서 가장 슬픈 조각”이라며 30분 동안 눈물 을 흘리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뒤 마크 트웨인의 그 말은 이 사 자상을 수식하는 공식 수식어가 됐다. 그 피의 연못 위에는 이제 해마다 여름 무대가 설치돼 야간 연주회가 개최된다.

이제 스위스는 더이상 외국으로 용병을 보내지 않는다. 오직 한 나라에만 용병을 보낼 뿐이다. 그곳은 교황이 있는 바티칸이다. 바티칸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은 바티칸 시국 입구마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황적청의 제복을 입고 우뚝 서 있다. 이 바티칸 파견 용병이 되는 조건은 대단히 까다롭다. 대학 졸업장이 필수며(스위스에서 대학졸업장을 요구하는 직장 은 교사와 용병 단 2군데 뿐이다) 3개 국어에 능통해야 하고, 키 1백80cm 이상의 신체조건을 갖춰야 한다. 마지막 남은 스위스 용병은 스위스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방위태세로 유명한 스위스의 오늘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 나 스위스엔 최근 무장과 비무장 논쟁이 한창이다. 핵무기가 대륙을 넘나 드는 시대에 재래식 형태의 무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하고 있다. 40년 동안 계속되는 예비군 생활에 염증을 내기 시작하는 젊은층에서 이런 주장은 특히 강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세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자상이 후손들에게 끝없이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일 것이 다.

현재 스위스 연방은 26개 주로 이뤄져 있고 국민개병제 원칙을 고수하면 서 국내치안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해 빈 부 차가 거의 없고 국민소득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더이상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스위스를 지금의 스위스 사람들은 떠나고 있다. 너무나 평안한 탓에 도대체 ‘변화’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스위스의 대도시를 떠돌아다니는 마약중독자와 높은 자살률의 원천도 우리에겐 평화롭게 보이는 그 ‘무변화’ 탓으로 여겨진다. 어차피 모든 사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마지막 남은 용병으로 바티칸 지킨다

(사진/스위스의 마지막 용병으로 바티칸 베드로성당 아래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

이날 밤 들른 맥주홀에서 만난 스위스 청년들은 귀에 몇개의 귀걸이를 한 20대 남성들과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춤을 추는 10대 여학생들이 대부분 이었다. 동양인의 눈에는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늦은 밤시간이 되자 음주운전을 해선 안된다며 잔을 거절할 줄도 알고, 내일 학교에 가 려면 이제 가서 자야 한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도 아는 스위스 청년 들은 그 나름의 질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관광지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한 밤의 정경 속에서 비슷한 역사를 지닌 한국 서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또다른 촌스러움 때문일까?

며칠 뒤 바티칸 베드로성당 아래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 용병들 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무심한 눈빛에서 스위스의 슬픈 역사가, 슬픈 사자상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루체른·바티칸=권태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