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스핏파이어 그릴'

김정룡/ 영화평론가

작위성으로 따지자면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라 빠르망', `스핏파이어 그릴' 사이의 수위 진폭은 그리 크지 않다. 한 간 호사가 강압에 못 이겨 포로의 손가락을 절단할 만큼 으스스하고 참혹한 전장의 한켠에서 한나가 경이로운, 아니 한가로운 박애 정신을 보여준달 지, 자신을 해코지한 이를 차례로 살해해 나가던 이가 주범을 만난 뒤 질 질 뜸을 들이다 대화를 통해 용서해주고 이튿날 펄쩍거리며 정원을 뛰어 다니는 둥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이야기 구조는 실소를 연발시킬 의도로 짜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억지스럽다. `라빠르망'의 짜맞추기도 이에 뒤 지지 않는다. 애인으로부터 동거 제의를 받은 날 밤 리자로 하여금 급하 게 짐을 꾸려 떠나게 한다든가, 진작에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버젓이 알 리스의 알리바이를 남발하는 등 영화의 서사는 아주 태연하고 태평스럽게 조작적이다.

헌데 이런 억지 춘향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노라면 괜히 허투루 돈쓰 고 시간만 날린 것 같아 속이 편치 않기 마련이다. 눈은 아파오고, 그럴 수록 마음은 모질어지고. 그래 나는 간혹 다음과 같이 스스로와 타협한다 . 개연성이 전부는 아니다, 스크린은 넓고 시간은 길다, 다른 걸 다르게 감상하고 해석하고 즐길 권리가 나에겐 있다. 남들이 들으면 역시 실소할 일이겠으나, 내 경우엔 꽤 효력이 있다. 이런 식으로: `퐁네프의 연인들' 에선 줄리엣 비노쉬가 흐린 촛불과 약해져가는 시력 때문에 그림을 제대 로 보지 못했는데,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킵은 그녀를 밧줄로 시원스 레 끌어올려 아주 확실하게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애틋한 배 려다. 사선·국경·윤리를 넘는 운명의 사랑 대신 이게 나를 감동시킨다. `라빠르망'의 복잡하게 뒤엉킨 얘기는 결국 인간의 연약한 본성에 대한 애절한 은유가 아니겠는가.

`스핏파이어 그릴'도 그렇게 봤다. 여기서 문제점을 들춰내기란 사실 누 워서 풍선불기보다도 쉽고 불어봐야 신날 것도 없는 일이니, 그런 건 꺼 내지 말기로 하자. 살인죄로 5년을 복역하다 가석방된 퍼시가 북부의 작 은 마을 길리드에 와서 먼저 한 일은 싸움이었다. 이방인에게 던지는 경 계의 눈길, 닫힌 마음, 의혹과 오해, 선입견. 퍼시는 자기 안과 밖으로 깊고 멀리, 고루 싸움을 퍼뜨려 나간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마을 아저씨 들의 배타주의와 아줌마들의 호사가적 악취미에 당당하고 강력하게 대처 한다. 인내니 포용이니 이해주의 따위 고루한(요즘 같은 세상에선 별 효 력도 없는) 원칙에 눈치보지 않고, 그녀는 처음부터 생의 의지를 온몸에 전진 배치한 것이다. 이 편안한 당당함은 새로 사귄 벗 셀비에게 전염된 다. 걸핏하면 면박이나 주는 남편 네움의 코 앞에서 고개를 번쩍 들고 이 혼을 선언할 정도로 그녀 또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간다.

이 싸움은 그러나 타인과 나를 갈라놓고 상처 입히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 오히려 한나의 경우처럼 강퍅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불신을 녹여 화해 를 이끌어내는 아름다운 도전인 것이다. ‘에세이 콘테스트’는 그 싸움 의 절정이며 화해의 절정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가슴아픈 사연들을 접하 며 사람들은 서서히 광장으로 나온다. 심술궂은 우체국 부인도, 돌부처 영감도, 시큰둥한 중년의 노동자도 모두 혼자 사는 집에서, 밀실에서, 산 속에서, 편견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훈훈한 동화다. 동화의 주인공 퍼시는 끝내 새로운 인생을 살지 못했으나 , 그녀는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스핏파이어 그릴 식당- 공격용 비행 기(Spitfire)처럼 날아와 마을을 뜨겁게 달군 석쇠(Grill). 이제 새 주인 이 퍼시의 생을 살 것이다. 또 한나의 새로 태어난 아들이면서 퍼시의 정 신적 아들인 ‘자니 B’도 있고. 이 정도면 이 영화엔 묘약이 있는 거다. 상처를 낫게 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