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97 아카데미 영화상의 선택

(사진/미국의 대표적 독립영화작가로 꼽히는 코엔형제의 `파고'는 재기 넘치는 각본에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여경관 역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지난 3월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쉬라인 오디토리움에서 열렸던 제6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초국적 전략을 택한 할리우드’라는 미국영화산업의 경향을 집약해 보여줬다. 시상 결과가 겉으로 보여준 모습은 ‘독립영화 의 약진’과 ‘영국영화계의 맹활약’으로 요약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거액은 따로 챙기고 푼돈은 나눠준다

그러나 실은 미라맥스는 월트디즈니에 속해 있고, `파고'를 만든 그라머 시는 유럽의 메이저 폴리그램 소유다. 또다른 작품상 후보였던 `샤인'의 파인 라인은 워너 소속의 뉴 라인 시네마 소유. 세계의 영화 비즈니스계 가 비할리우드 메이저를 가리켜 `‘인디 무비(독립 영화)’라고 통칭하지 만, 그 뿌리를 파고들면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따 지고 보면 작품상 후보 가운데 진정한 의미의 독립영화는 옥토버 필름의 `비밀과 거짓말' 뿐이고, 이 작품은 단 한개의 오스카도 가져가지 못했다 . 그러면 메이저 영화사가 직접 제작한 영화들은? 이들은 시각효과상이나 분장상 등의 기술적인 분야의 수상에 국한됐다. `미션 임파서블' `인디펜 던스 데이' `트위스터' 등의 블록버스터들은 `‘예술’을 포기한 대신 지 난해 이미 4억5천만달러·5억달러·8억달러에 달하는 흥행수익을 각각 챙 겼다. 아카데미 특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 `‘푼돈’은 자기들과 결 코 딴 식구가 아닌 독립영화사들에게 넘겨도 무방하다는 속셈이 읽혀진다 .

(사진/`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작품상과 감독상 등 9개 부문을 휩쓸었다. 감독상을 받은 안소니 밍겔라.)

영국은 시상식 직후 `‘영국영화의 르네상스가 찾아왔다’는 부푼 기대감 을 감추지 않았다. “영국이 관여한 작품들이 31개 부문에서 오스카 후보 에 올랐고, 이 가운데 14개 부문을 차지했다. 이는 영국 영화산업의 부흥 을 예고한다”(`이브닝 스탠더드') “영국의 재능과 기술적 전문성이 이 룬 위대한 승리다(내셔널 헤리티지의 버지니아 보텀레이 서기) 등의 환영 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나 `더 타임스'는 영국인의 손을 거 친 `잉글리쉬…'가 미국 자본의 생산품임을 들어 샴페인을 터뜨리기에 아 직 이르다고 지적했다. 정작 영국 자본과 영국 사람이 만든 `비밀과 거짓 말'은 단 하나의 오스카도 가져가지 못했다.

`잉글리쉬…'를 잘게 조각내 보면, 색다른 점이 눈에 띤다. 제작비는 미 국 자본이 댔고, 감독과 남녀 주인공은 영국 배우이고, 원작은 캐나다의 소설이고, 여자조연상을 수상한 줄리엣 비노쉬는 프랑스 배우다. 다른 작 품상 후보로 넓혀보자. `샤인'의 감독과 남자 주연은 오스트레일리아이며 , `피플 대 래리플린트'의 감독은 체코 출신이다. 지난해 5개 작품상 후 보들 가운데 자본과 스태프가 모두 미국 일색인 것은 `아폴로13'뿐이다. 그야말로 다국적이며 초국적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는 “영국영화냐, 프랑스영화냐 하는 구분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자본이나 인력 면에서 할리우드는 이 미 세계화됐다. 유럽 각국의 영화 자본이 할리우드 자본과 섞여 있고, 할 리우드는 유럽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의 인력을 흡수하고 있다 . 그래서 요즘엔 `‘뉴 할리우드’라는 말을 쓴다”고 말한다. 세계의 영 화산업을 주도하는 할리우드가 자본의 국경을 무시하고, 메이저와 독립영 화의 경계를 넘어 이곳저곳의 자본과 인력을 끌여들여 자기 분신을 확대 재생산하는 `‘초국적 자본’식의 이윤 만들기를 택한 모습이 역력하다. 독립영화와 영국영화의 약진으로 비춰지는 아카데미의 외형이 실은 `‘뉴 할리우드’가 선택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아카데미다운’ 보수적 선택 여전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면, 5천1백73명에 달하는 영화예술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의 보수적 선택 성향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포르노성 성인잡지 `허 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의 `‘표현 자유 투쟁’을 그린 `피플 대 래 리 플린트', 무차별한 빨갱이 사냥을 뜻하는 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을 분 명히 떠올리게 하는 `크루서블' 등은 후보 지명 단계부터 탈락됐고, 마돈 나가 열연한 알란 파커 감독의 `에비타'는 혁명가 체 게바라를 등장시켜 선지 주제가상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장대한 시대극적 구조와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잘 섞어놓아 `‘아카데미용’이란 딱지가 붙은 ` 잉글리쉬…'는 예상대로 제69회 아카데미를 석권했다. 미국 케이블 방송 `CNN'의 `‘CNN 인터액티브’가 인터넷을 통한 무작위 투표로 뽑은 수상 목록을 보면, 작품상과 감독상은 각각 `에비타'와 `파고'의 코엔형제에게 돌아갔고, `잉글리쉬…'는 여자조연상 수상에 그쳤다.

이성욱 기자/ 한겨레 문화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