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곳곳에 도사린 공포의 촌지

(사진/동심에 상처를 입은 학생들이 줄지 않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하얀봉투'의 전달 여부에 따라 학생들을 구별짓기 일쑤다.)

“조카는 3학년 때 지금의 학교로 전학왔습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짝꿍 과 실을 가지고 놀다 선생님께 들켜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조카의 뺨을 때리시고, 이어 짝의 뺨을 때리시더라나요. 그런데 조카는 한대를 더 맞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교실 뒤에서 1시간 이상 무릎을 꿇고 벌까지 섰답니다. 다음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조카에게 이런 말씀을 하 셨다고 합니다. ‘너는 전학온 태도가 나쁘니 내일 엄마를 모셔오도록 해 라. 만일 엄마가 바빠 오지 못하면, 올 때까지 학교에 나타나지 말아라. ’ 다음날 언니는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전주에 사는 한 예비교사가 보내온 사연이다. 아직도 교육현장 곳곳에 남 아 있는 돈봉투의 패악을 극적으로 전한다. 물론 그는 나름대로 교사의 형편을 이해하려고도 했다. 많지 않은 봉급, 고루 관심을 나눠주기에는 너무 많은 학생들, 그리고 자기 자식에게만 교사의 각별한 애정을 바라는 학부모의 욕심 등등. 그러나 앞으로 교단에 서야할 사람으로서 느끼는 절 망감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무시할 수 없는 ‘하얀 봉투’의 효험

돈봉투를 받지 않으려는 교사들이 늘고 있지만, 돈봉투의 뿌리는 깊고도 깊다. 새학기면 여전히 돈봉투가 오간다. 추석같은 명절이나, 소풍, 스승 의 날 따위의 날에도 오가는 돈봉투 그림자가 어지럽다. 학부모들은 돈봉 투를 주어야 할지, 액수는 얼마로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교 육현장은 여전히 돈봉투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돈봉투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선생님과 부모 사이에 돈이 오갈 까닭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이다.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며 장롱 깊숙이 감춰둔 옷을 빼 입는 어머니나, 가정방문을 하겠다는 선생님의 전갈에 밤 새 속을 끓이는 아버지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부모가 선생님에게 흰 봉투를 내밀 때, 그리고 그 봉투를 선생님이 당연한 듯 슬쩍 받을 때, 동심은 그저 놀랄 뿐이다.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겠다며 날짜를 정해 주었습니다. 우리집에 오는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날 따라 비가 심하 게 내렸습니다. 어머니는 ‘날씨도 안 좋고, 길도 머니 선생님이 오시지 않겠지’하면 안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선생 님인데 집 근처까지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급히 우산을 들고 나가 선생 님을 맞았습니다. 선생님은 조금 이야기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 그러자 어머니가 돈봉투를 내미는 게 아닙니까. 돈봉투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못이기는 척 하며 돈봉투를 받아 넣었습니다. ”(인하대 학생)

학부모들은 여전히 돈봉투의 효험을 얘기한다. 부모가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뒤부터 아이의 성적이 잘 나왔다거나, 이름 대신 ‘야’로 부르던 선생님이 갑자기 하루에도 몇번씩 아이의 이름을 불러준다든가 하는 얘기 들이 떠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선생님께 인사를 소홀히 해 어 떤 아이가 불이익을 받았다는 소문은 금세 공공연해진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촌지를 주지 않으면, 아이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창문쪽 등 구석진 곳에 앉힌다거나, 심술궂 은 짝을 붙여준다거나, 손을 들어도 시키지 않는다고 여기는 거죠. 어느 부모가 그런 상황을 원하겠어요.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가 기죽지 않고 학 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촌지를 준비하는 겁니다.”(산본의 학부모)

돈봉투가 심한 곳은 역시 초등학교다. 처음으로 품을 떠나 학교에 들어가 는 아이들이라 부모들의 신경이 팽팽하다. 아이가 뿌듯하고 대견스러우면 서도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이제는 부모나 다름없는 선생님에게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돈봉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새로운 걱 정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부부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은 대개 돈봉투를 내미는 쪽으로 나기 십상이다.

“큰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아내와 점심을 하고 싶 어서 전화를 했더니 오후 2시30분에 학교에서 자모회가 있어 가봐야 한다 는 겁니다. 학부모들이 돈을 걷어 선생님께 준다고 하더군요. 절대 그러 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건 아이들 장래를 망치는 일이라구요. 그런데 아내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오히려 담임선생님이 누군줄 아느냐며 훈계를 하는 겁니다. 아내는 그 학교 교사 출신입니다. 아내는 10만원을 내겠다고 못을 박더군요.”(서울의 학부모)

학부모들은 돈봉투를 바라는 듯한 일부 교사들의 행태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카센터를 운영한다는 한 학부모는 아예 “교사 손님은 도 움이 안 된다”고 하소연한다. “학교에 있다는 인사가 요금을 대신합니 다. 선생님 한두분에게 공짜로 서비스한 것이 화근이 된 겁니다. 누군 돈 을 받고, 누군 공짜로 해줄 수 없어 아예 돈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습니다. ”

때문에 돈봉투란 뿌리뽑을 수 없는 관행이라고 자포자기하는 학부모도 있 다.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란 있을 수 없다. 돈봉투가 교육을 교사와 학부 모 사이에 거래되는 물건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호텔에서 치른 교사들 송년모임

“지난 연말, 일부 학부모들이 교장선생님께 조촐한 송년모임을 제안했습 니다.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교무실에 모여 다과를 들며 서로 감사하는 마 음을 전하자는 뜻이었죠. 그런데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이 송 년모임 장소로 호텔을 고집하는 거예요. 호텔이 아니면 송년모임을 갖지 않겠다는 투였습니다. 학부모들은 결국 3백만원을 모아 부산에서 꽤 이름 난 호텔 연회실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년모임에서 학년별로 돈봉 투가 돌아갔고, 교장선생님에겐 따로 돈봉투가 들어간 것으로 압니다.”( 부산 김아무개씨)

우리의 교육현장 곳곳은 여전히 돈봉투에 오염돼 있다. 교사에게 돈봉투 를 바치는 학부모들의 사연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학교 교육도 썩어간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