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한겨레21

‘돈봉투’ 찢고 ‘참교육’ 부른다

(사진/"교사들의 결단은 교육을 바로세우는 토대다." 촌지 거부 결의와 파격적인 교육방식으로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서울 한가람고등학교의 수업 모습.)

`한겨레21'은 지난해 이맘때 독자들과 함께 ‘돈봉투 특집’을 꾸몄다. 그때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세무공무원과 경찰관, 기자, 그리고 교 사가 기차여행을 했다. 우연히 같은 자리에 앉게된 이들은 자연스레 대화 를 시작했다. 흥이 돌자 열차 안을 왔다갔다하는 수레매점에서 맥주와 오 징어를 시켜 나눠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도 계산을 하지 않 는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장사꾼은 도대체 누가 돈을 낼까 궁금해 하며 마냥 기다렸다. 그러는 새 기차는 종착역에 들어 서고 말았다.”

`한겨레21'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돈봉투 문제를 다시금 돌 아본다. 돈을 받는 데만 익숙한 부류로 웃음거리가 된 네 사람은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한 사람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 몇푼의 돈에 자신의 양심을 팔지 않고, 직분을 지키려는 그는 바로 교사다. 몇몇 학교에서 돈 봉투를 받지 않겠다는 집단적인 자정결의가 들려온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도 도덕의 울타리를 허물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교육현장에서 돈봉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특히 요즘 같은 새학기면 학교를 찾는 학부모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돈봉투 바람이 세차다 고 한다. 그럼에도 교사들이 앞장서 돈봉투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려 애쓰 고 그런 모습이 힘을 얻어가고 있어 반갑다. 그래서 `한겨레21'의 두번째 돈봉투 얘기는 희망으로 시작했다.

대구에 사는 정영숙씨는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오누이 를 둔 주부다. 정씨는 최근 이사를 하면서 둘째아이를 집 근처 학교로 전 학시켰다. 전학 이틀 만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교에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교실청소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주위에서 돈봉투를 준비해 가야 한다고 권하는 거예요. 미루고 미루다 2주쯤 지나 결국 찜찜한 마음으로 학교에 가 청소만 하고 돌아왔죠.”

그러나 정씨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던 것인지 깨닫고 얼 굴이 빨개졌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깨끗이 청소해주셔서 고맙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지레 짐작만으로 자신과 교사를 모욕했다는 자책감 을 씹어야 했다. “선생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고, 잘못된 조언에 기대 돈봉투를 준비했던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 선생님이 돈봉투를 받지 않는 분이란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부끄러운 돈봉투 걱정 사라져 간다”

학교에서 돈봉투를 추방하는 싸움은 멀고 험난하다. 학부모가 은밀히 교 사에게 돈봉투를 건네는 관행이 아직도 깊고 넓게 우리 사회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의 작은 물결은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확산되 고 있다. 공식적으로 돈봉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학교가 늘고 있고 , 교사들의 노력 또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대전 문정초등학교(교장 이지완) 교사들은 최근 학교에서 돈봉투를 추방 하기로 공식 선언했다. 학부모의 촌지와 부교재업체에서 제공하는 향응 따위를 일체 거부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교사들은 “교직사회의 신뢰를 되찾고, 스승을 존경하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돈봉투를 추방하는 데 앞장 서겠다”고 다짐한다.

교사들의 이런 결정에 학교도 적극 협조하고 나섰다. 학교는 학교운영위 원회를 열어 학부모위원들에게 교사들의 결의를 전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 한 학부모는 “교사들의 이번 결단이 우리 교육을 바로세우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올해 새로 문을 연 서울 한가람고교(교장 이옥식)는 애초부터 돈봉투가 없는 학교로 태어났다. 학교는 교사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촌지는 물 론 접대나 향응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3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교사 14명(외국인 교사 6명 제외)이 여기에 흔쾌히 동참했다. 학교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돈봉투 추방 의지를 강력히 전 달했다.

학부모들은 사실 이 학교의 장래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학생들이 시간표를 짜서 수업을 골라듣는 파격적인 교육방식은, 열린 학 교로서의 장점에 대한 기대에 앞서 입시에 대한 불안감이 먼저 학부모들 에게 다가왔다. 더욱이 같은 재단에 속하는 영등포여상과 터를 같이 쓰고 있어, 자녀들의 생활지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런 우려를 반영 하듯 지난 2월5일 열린 학부모 총회에는 신입생 3백12명의 부모와 가족 등 모두 8백여명이 참석했다.

이 교장은 이 자리에서 “돈봉투는 말할 것도 없고 신원을 밝히지 않는 학부모의 전화도 일체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학교가 불신받는 상 황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촌지나 돈봉투가 학교를 불신케 만드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신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앨 생각입니다.”


교사 임용 당시 다짐… 학부모 방문도 사절

이 교장은 “학교의 돈봉투 추방운동이 벌써 재미있는 일화를 뿌리고 있 다”고 자랑한다. “입학식 며칠 전, 학부모 한분이 아이와 함께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마침 동료선생님이 사다놓은 과일쥬스병을 보더니 ‘뭐라 도 들고 오려 했는데, 아이가 그러면 선생님이 사표내야 한다며 말리는 바람에 그냥 왔습니다’라며 무안해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부모님에게 `` ‘애들 말을 믿어야 합니다. 엄마가 선생님말을 믿지 않으면 학생도 선생 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얼굴을 활짝 펴시더군요.”

서울 서정초등학교(교장 김영소)는 최근 새학기를 맞아 학부모들에게 교 장 명의의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새학기만 되면 몇몇 학부모님께서 자 녀의 학교생활을 염려한 나머지 담임교사와 상담하기 위해 학교에 오시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학부형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사오니, 되도록 학교방문을 삼가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학교는 대신 학교 전화번호 2개를 신설하고, 전체 40개 학급에 각각 교환 전화를 설치했다. 학부모가 학교로 굳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자녀교육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학부모들은 대개 수업이 끝난 뒤인 , 오후 3시 이후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한다. 학부모와 교사가 직접 대면 하는 대신 전화를 통해 언제고 부담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다. 한 학부모 는 “학기초 선생님에게 빈손으로 찾아가기도 그렇고, 돈봉투를 내밀기도 뭐하고 내심 고민했는데, 가정통신문을 받으니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말 한다.

경기 고양시 화수초등학교(교장 임종진)는 지난해 3월 교장과 교사가 모 여 촌지추방 의지를 다진 이후, 서서히 촌지를 받지 않는 학교의 이미지 를 굳혀가고 있다. 학교는 최근에도 학부모총회를 열어 “촌지는 학교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암적 존재니 조금도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며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임교장은 “처음에 교사들의 강력한 의 지에 반신반의하던 학부모들도 이젠 신뢰를 보낸다”고 말한다.

이밖에 설립 당시부터 돈봉투 추방을 선언한 이화여자사범대학 부설 초등 학교와 경기 안양시 민백초등학교를 비롯해 서울 중동고, 경기 과천고 등 도 지난 몇년 전부터 촌지 추방운동을 벌여 착실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처럼 학교로부터 돈봉투 추방운동이 확산돼가면서 학부모들의 생각도 바뀌고 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내 아이가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더디지만 학부모들도 돈봉투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북 전주에서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홍은희씨는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리며 학교 교단에 설 꿈을 키우고 있다. 홍씨는 자신이 2학년이었을 때 어머니가 돈봉투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큰 상처를 받았다 . 그 선생님은 홍씨가 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그리며 존경해왔던 선생님이었 기에 상처는 더욱 컸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저축의 날 선생님은 홍씨를 교무실로 불러 책 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가져가서 저축하라’며 건 네주셨다. 그것은 한해 전 어머니가 건네드린 바로 그 돈봉투였다. “학 원강사를 하면서 비슷한 유혹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그 선생님의 모습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 학부모와 학생, 교사를 함께 옥죄이던 돈봉투 사슬의 한 고리가 끊기 면서 희망이 확대재생산되는 좋은 사례이다.


학교·교사·학부모 합심에 달려 있다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전풍자 공동대표는 “학교 돈봉투 수수 관행이 사라지려면 먼저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만 잘 봐달라’는 자녀이기주의 를 버려야 한다’면서 ‘이와 함께 학교장이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촌 지 안받는 학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가장 효과적 인 방법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안양 민백초등학교 김윤배 교장도 ‘돈봉투는 교원의 자존심과 명예를 훼 손시키고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는 점을 교장이 교사와 학부모 에게 이해시키고 동참을 호소해야 한다’며 ‘교사들에게 학생들의 존경 과 학부모의 신뢰보다 가장 큰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변화의 싹은 아직 튼튼하지 못하다. 언제 거센 바람이 불어 이 여 린 싹을 해칠지 모른다. 돈봉투 추방을 위한 학교와 교사, 학부모의 합심 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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