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그 희멀건 눈망울을 외면한다면…

시인 신동엽님의 절규는 여전히 찌르는 양심의 가책으로 남아있다.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니고/.... ./ 굶주린 아들 딸애들의/ 그, 흰 죽사발 같은/눈동자를,/ 죄지은 사람처 럼/ 기껏 속으로나 눈물 흘리며/ 바라본 적이 있은/ 사람은 알리라/..../ 뼈를,/ 깎아 먹일 수 있다면/ 천개의 뼈라도 깎아 먹여주고/ 싶은,/ 그 아픔을/ 맛본 사람은 알리라.”(`금강'에서)

오늘 꽃들이 무더기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에 가슴 허물어지는 자책을 나누고 싶다.

그는 중국 연변에서 최근 돌아왔다.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월경해온 북쪽 주민들에게 되는대로 먹거리를 마련해주는 게 그곳에서의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두 사람만의 노력이 갖는 한계 를 피할 수 없어 돕기운동의 불씨라도 지피려 귀국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제 정신 가진 백성치고 권력자보다 먼저 전쟁하자고 하는 나라 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북한이 지금 그렇답니다. 정권의 파멸을 걱정 하는 권력자들은 외면하지만 백성은 전쟁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겁니다 .”

목이 메인듯 말은 자주 끊겼다. 눈에 가득 밟히는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 이 끊긴 말 사이사이에 가득했다.

“가장 먼저 아이들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두만강변에서는 먹을 거리라도 많은 중국땅으로 가라고 갓난 아기를 요람에 실어 강에 띄우는 모습도 자 주 목격되지요. 요람이 얼마 가지 못해 가라앉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랍니다. 먹힌다고도 하네요.”

도대체 같은 민족으로서 뭐하는 거죠, 굶주림을 그저 정략적 흥정거리로 만 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민족과 역사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 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걸어다니는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 그 참혹한 인간의 파괴’ 를 이야기하며 참았던 절규를 토했다.

1840년 대기근으로 아일랜드에선 전체 주민의 절반 이상인 3백만여명이 고향을 떠났다. 수십만명이 굶주림에 죽어갔다. 그 참상은 이웃한 영국의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 이렇게 나타난다. “아일랜드의 아이는 어차피 제대로 길러질 수 없기 때문에 포동포동하다면 차라리 식용육으로 팔아넘기는 편이 좋다.” ‘흰 빵과 홍차를 마음껏 즐기는’ 당시 영국인 들이 죽어가는 아일랜드인에 대해 가졌던 오불관언의 시각을 고스란히 전 한다. 토지의 90%를 수탈했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토지를 감자로 뒤덮 어 감자 흉작에 대처할 능력을 빼앗아 버린 것은 영국이었다. 그 때문만 은 아니지만 끝끝내 계속되는 아일랜드인의 저주 앞에서 영국인은 자유롭 지 못했다. ‘해 지지 않는 왕국’의 위광 속에서도 그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때문에 잠을 설쳐야 했다.

신동엽님은 단락을 이렇게 맺는다. “이미 끝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 라,/ 이미 죽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라.”

그러나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녘 아이들의 희멀건 눈망울이 원망 되어 무 더기로 쏟아진다. 꼭 아이들을 닮은 개나리, 그 노란 꽃잎을 무수히 피워 내는 이 계절이 절망스럽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