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4월10일 제 152호

정치의 볼모, 북한 어린이

(사진/북한 한 탁아소의 흔들침대. 다섯명의 어린이가 함께 누워 탄 모습이 이채롭다.)

“같은 동족인 북한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는 데도 한국 정부가 정치논리 를 앞세우며 원조를 안 하고 있는 데 대해 세계 각국이 이상한 눈초리로 볼 것입니다.”

최근 활발히 ‘북한돕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이런 ‘한국의 태도’가 유엔 등의 북한지원금 모금을 어렵게 만드는 큰 요인 이라고 비판했다. 남한 정부의 이런 태도가 “제 민족마저 적극 나서지 않는 데 우리가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 태도를 다른 나라에 심어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2월28일 유엔세계식량계획은 지금까지 대북한식량지원 모금액은 목표액 4천1백60만달러의 43%에 그치고 있다고 발표했다.

85년 에티오피아보다 훨씬 심해

그러나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들은 북한의 식량 비축량이 4~6월 께 고갈될 것으로 보고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국제연합아동기금(유니 세프)은 지난 3월25일 국제사회가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해 고에너지 우 유를 긴급 지원할 것을 촉구했으며, 우유 1차분을 4월 초 평양에 공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특히 북한쪽에서 ‘4월 위기'를 말하며 원조물자를 가급적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해오고 있다고 상황의 급박성을 전한다. 북한 식량사정의 어려움은 지난 3월11일 독일을 방문중인 김창용 북한 외교부 부장이 독일 정부에 긴급 식량원조를 요청한 데서도 다시 확인된다. 그러 나 각종 북한 원조단체의 고민은 또다시 한국 정부의 태도로 모아진다. 지난 95년 홍수피해 이후 여러 차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 유진벨재단 스티브 린튼 이사장은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북한에 대 한 미국의 지원량보다 최소한 10배는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이것이 같은 민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며 국제사회의 지원물꼬를 틀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린튼 이사장은 “현재 미국이 북한 원조액의 가장 많은 부분을 내고 있지 만 이것에만 계속 기댈 수는 없다”고 진단한다. 린튼 이사장은 한 예로 미국의 대북지원은 지난 85년 에티오피아 기아 때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북한의 식량사정이 당시 에티오피아보 다 훨씬 어려운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미국인들이 북한과 아프리카의 조건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린튼 이사장은 이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백악관 담당관리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북한의 가장 가까운 우방은 중국인데 중국은 올해 옥수수 풍년입니다. 거기다 같은 동포라는 한국은 쌀 풍년입니다. 일본도 쌀 재고 때문에 골 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심이고 북한 문제 는 동아시아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동포인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인들이 해결해야 합니다. 왜 미국 사람 세금으로 북한에 쌀을 보 내야 합니까.”

또다른 국제기구 관계자도 남한의 높아진 위상이 북한 식량원조를 방해하 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남한은 지난 96년 말 ‘잘사는 나라 모임’ 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가입국이 됐다. 이에 따라 남한은 ‘그 위상에 걸맞게’ 국제기구에 대한 각종 분담금과 비정부기구(NGO) 지원금이 늘어난 상태다. 이들 지원금은 빈곤국에 대한 각종 지원에 주로 쓰인다. 이 관계자는 남한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의 북한 원조금 모금의 어려움도 커졌다고 말한다. ‘NORTH KOREA’ 가 굶주린다고 하면 ‘OECD에 가입한 KOREA가 그럴 리가 있냐’고 생각하 는 사람이 많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북한 자존심도 모금에 걸림돌

(사진/YWCA가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낼 분유를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하고 있다. 지원창구가 대한적십자사로 단일화돼 있는 것도 현실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높다.)

이렇게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정부도 지난 3월20일 세계식량계 획·유엔인도지원국(UNDHA)이 대북 식량지원을 호소할 경우 인도적 차원 의 대북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부 의 한 관계자는 이런 조처가 “북한이 4자회담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는 등 최근 자세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혀 식량과 정치를 연계하는 기존의 방침이 변한 것은 아님을 확인했다. 따라서 정부 의 대북지원은 지금까지와 같이 ‘정치의 볼모’로 계속 남을 것으로 예 상된다.

이렇게 한국 정부가 계속 정치논리와 식량을 연계하는 한 ‘북한 원조에 한국이 걸림돌’이라는 국제기구의 시각은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다. 특히 국제기구의 대북 원조금 모금이 북한 어린이, 노약자, 임신부 등 상대적으로 식량부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1차적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남한 당국의 태도는 바로 북한 어린이의 고통을 외 면하는 처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물론 대북 식량지원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원인이 모두 남한 당국에만 있 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자존심’도 원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린튼 이사장은 미국에서 북한돕기모금운동에 쓰려 고 전단을 만들 때 일을 한 예로 들고 있다. 재단에서 모금운동에 쓰기 위해 만든 전단이 어쩌다 유엔대표부에 있는 북한 외교관의 손에 들어가 자 그 외교관은 바로 자신에게 전화로 화를 냈다고 말한다. “왜 전단에 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라고 썼느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원래 국제사회에서의 모금이란 에티오피아 하면 떠오르는 것처럼 ‘참혹 한 사진’이 텔레비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야 활발해진다고 모금 관계 자들은 말한다. 린튼은 그래서 모금에 필요하니 감정에 호소할 만한 아이 들의 모습을 찍자고 하면 북한사람들은 “죽으면 죽었지 나라 망신은 못 시킨다”고 말한다고 전한다.

남한 당국의 정치와 식량 연계 방침이 국제사회에서 대북 식량지원을 저 해하는 요인이라면, 국내에서는 대북 창구단일화 방침이 북한원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난 3월27일부터 ‘북한 동포에게 1만t의 옥수수 보내기’ 캠페인을 벌 이고 있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등 18개 단체 관계자들도 정부의 창 구단일화조처는 북한 어린이 지원의 긴급성을 외면한 조처라고 비판의 목 소리를 높인다. 이날부터 4월2일까지 전국 성당 교회 사원 대학 등지에서 총 17억원(옥수수 1만t 가격)을 모을 계획인 이들은 “아사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북한 실정에서는 대북 식량지원이 대규모로 빠르게 이루어 져야 하는 데 정부의 창구단일화는 이를 막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대한적십자사 단일 창구’방침 아래서는 곡물이 북한에 도착하기 까지 시간이 지나치게 소요될 뿐 아니라 한번에 대량으로 보낼 수도 없다 는 것이다.

이 단체들은 특히 내부적으로 원조 최우선 순위로 잡고 있는 북한 어린이 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다양한 접촉과 전달창구를 갖고 필요한 양식을 적시에 대규모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남한 당국의 대북 경제정책이 북한 어린이 의 굶주림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임을출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