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야만’과 싸우자

<사진>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원 방현석씨

지난 11월13일자 주요 일간지들에는 <AP 연합>으로부터 받은 똑같은 사진이
빠짐없이 실렸다. 나의 눈을 몹시 거슬리게 만든 그 사진의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노근리 주민 헌화/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정은용씨와 정구학씨가
11일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지에 장미꽃을 헌화하고 있다.”(<한겨레>)

미국이 약자를 철저하게 멸시하는 법

<사진>선틴현 밀라이박물관에 있는 미군양민학살피해자를 형상화한 동상.
이곳에선 한국군의 양민학살도 적지 않았다

사회면 가운데를 할애해서 더 크게 사진을 뽑은 다른 신문의 설명은 조금 더
자상했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정은용 노근리 대책위원장과
정구학씨가 11일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있는 참전기념비 앞에 장미를
바치고 있다.”(<조선일보>)

용서와 화해, 그것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순서가 있다.
미국 정부의 분명한 사죄와 응분의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응어리 진
가슴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피해자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참전기념비에
헌화하게 만든 것은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은가. 스스로 강자라고 믿는 자들이
약자들을 더 철저하게 멸시하는 방법까지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의 노근리와 화해하려는 겸허한 마음 없이는 역사 속의 노근리와 진정으로
화해할 수 없다. 우리 역시, 우리가 반인류적인 양민학살을 저지른 베트남의

역사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의 베트남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상대를 눈 아래로 보면서 그들과 화해하겠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며 그들에 대한 모욕이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회원인 나는 세 차례 찾은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인의 오만과
자기과시를 한두번 목도한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돈푼이나 쥐면, 자기보다 조금 누추한 나라의 사람들은
우습게 여겨도 된다는 이상한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베트남과 진정으로 화해할 수 없다.

지난달 다시 찾은 베트남에서 나는 또 속도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한국이 시속 100km의 사회라면
베트남은 시속 50km쯤 되는 사회다. 차선과 상관없이 자전거와 오토바이, 승용차가 한데 어울려 느린
물결처럼 흘러가는 거리에서 나는 호흡도 한두배 천천히 해야 될 것만 같았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일부 관리자들에게는 이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경멸받을 느림이었다. 베트남 노동자들이 한국 관리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다. 그 속도 때문에 마찰이 일어난다. 악착같이 벌어야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8시간 노동이 끝나기 무섭게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흘러다니며 긴 저녁을 즐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연간 잔업 200시간 초과를 금지하고 주 5일 40시간
노동을 골자로 하는 그들의 제도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조금 나은 옷을 얻기 위해 잔업과 특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주권을 짓밟는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 호미와 삼태기만으로 250km의 구치터널을 단 돈 한푼도 받지 않고 밤낮으로 판 사람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못내 궁금했다. 무엇이 미군들로 하여금 비무장의 노근리 양민들을 그토록 서슴없이 사살하게
만들었을까, 그들도 사람인데. 3년 전 베트남의 밀라이에서도 같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밀라이에서 미군들에
사살당한 504명의 민간인들은 임산부 17명과 어린이 173명을 비롯해 모두 항거불능의 아녀자 아니면
노인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에 속하지 않는다.

미군들에게 ‘얼굴 노랗고 키작은 동양의 미개인’들은 사람에 가깝기보다는 원숭이에 더 가깝게 보였을 수
있다. 상대가 적어도 사람으로 보였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얼굴 하얗고 눈 푸른 미군들이 저지른
살육은 그렇다 치고 베트남 사람들과 똑같은 피부색을 가진 한국군들에 의해 저질러진 뇨름 마을의 살육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인종적 편견 아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베트남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을까.

극우 파시스트의 이념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피고문자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문없이
살해당하기를 열망하게’ 만들 만큼 이근안이 모진 고문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눈에 피고문자들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우 파시스트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곧 적이며,
적은 동일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의 대가로 30여년에 걸쳐 우리를 모욕하였던 극우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
다시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반인류적
학살사건에 대해 분명하고 책임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

노근리 양민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고 미국의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믿듯이 우리는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다. 정부차원에서 진상을
조사하고 사과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수행 주체였던 미국의 책임을 우리 정부는
물어야 한다.

지금 정부가 시작할 일은 거액의 국가 재정으로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끈기있는 청산작업이다. 반인류적 범죄 행위들을 외면하고 방치하면서 그의 기념관을
짓겠다는 것은 폐기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가 숙연히 기념해야 할 대상은 그 권리를
현재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이다. 인종, 생각, 문화, 경제적 수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야만과 싸울 의무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회원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겪은 악몽을 청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것들을 적대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박정희의 연대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 <한국과 베트남의 독자편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광명시 보건소장 박찬병입니다.

정기구독을 하면서, 얼마 전부터 또 그 전에도 베트남전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어떤 민족일까? 일본에 그렇게 집요하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배상을 요구하면서 또 최근 노근리사건을 통해 미국에 실태조사를 요구하면서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한번도- 제 기억엔- 사과나 제대로 된 실태조사마저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다는 것이 저를 아주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여성 장관이
국방대학원에서 베트남전에 대하여 “잘못된 전쟁”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장관자리를 내놓았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을까요?

<한겨레21>에서 이번에 아주 좋은 취재를 한 데 대하여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이제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성금을 보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요. 김정운씨가 보낸 글에서 읽은 것처럼 우리는 자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사과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데 베트남인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하서는 누가 사과해야 하나요? 자식들에게 선대가
잘못한 일을 내가 조금 사과했다고 면피할 수 있을까요?

기회가 닿는다면 그들에게 더 많은 배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한겨레21>에서 꾸준히 운동으로 벌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잊지 않도록…. 그래서
이런 식의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하기 위하여 ‘건치’ 회원을 중심으로 하든지 아니면 독립된
사회복지 단체라도 만들어 꾸준한 모금과 여러 가지 서비스를 통해 배상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건치 회원들이 일시적으로 가서 환자 몇명 돌보는 것보다는 현지에 병원- 최소한
의원급이라도- 을 짓는다는지 해서 지속적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수고하십시오.

경기도 광명시 보건소장 박찬병

parkcb@mail.kwangmyong.kyonggi.kr

<일요 투오이쩨>에 3주 연속 보도되고 있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어과 학생들은 베트남을 방문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의 정창권, 노은희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행운도 가졌습니다. 공원에서 놀이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함께 불렀지요. 아주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노근리사건’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 1945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한해 동안 극심한 식량공출로
200만명의 우리 동포가 굶주림 속에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긴 세월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30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450만명이 불구자가 되었으며,
200만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국이 우리 민족에 가한 고통에 비하면, 한국군의 잘못은
아주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 국민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그 어떤 모습도 신문지상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같은 한국인들의 노력이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보면서 한국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이지요. 내 친구들은 한국 배우 사진들을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모델>에 나온 김남주를 좋아합니다. 나는 장동건을 좋아하는 내 여자친구에게
한국배우의 사진이 장마다 실려 있는 ‘슈퍼스타’달력을 선물했지요. 이제는 한국이 우리의 아주
가까운 친구라고 느껴집니다.

어느 민족이나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있겠지요. 그건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 군인들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군은 단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용병이었을 뿐이니까요.

당신과 당신의 친구 치과의사 선생님, 그리고 <한겨레21>, 성금을 보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정창권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 주재 베트남 대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한국도 우리나라처럼 하루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응웬쭝히우/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학 한국어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