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평화와 화해를 위한 진료단’의 베트남 방문기

<-사진/디엔 니엔 양민학살의 현장에 있는 위령비와 학교.
건물 근처에 전선이 있지만 전력을 끌어올 비용이 없어, 학생들은
어둠침침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서울에서 출발해 다섯 시간의 비행. 때가 아닌데도 계속 비가 내렸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살갗에는 작은 소름이 일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베트남 중부는 얼마 전 닥친 홍수에 젖어 있었다.

쿠앙응아이성 선띤현 밀라이 박물관. 504명의 양민이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현장은 수십장의 관련 사진과 함께 광기의 역사를 그렇게

조용히 고발하고 있었다. 베트남 미술가들이 세운 조각들은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비에 젖은 채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미국인들은 그곳에서 그들의 핏빛 역사를 만난다. 방문록은 알 수 없는 언어들로 꽉 채워져 있지만 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는 내용이리라. 하지만 우리가 만나야 할 역사는 없다. 오직 살아남은 베트남 민중의

살갗에 박힌 총탄자국이 아니면 말없는 주검으로만 남아 있다. 학살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할머니는

빗속에서 잔디를 손보고 있었다. 비는 내리는데 우리 일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년간 끊었던 담배를

피워 물 수밖에 없었다. 잔기침과 함께 연기가 빗속으로 흩어진다.

환대와 냉대 사이, 비호아사 우물을 볼 수 없었던 까닭

사진/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는 선띤현 주석과 빈선현 당 부서기,
<일요 투오이쩨> 기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성금 200만원을 전달했다 ->

선띤현 주석 웅엔 딘 오안은 반가운 마음으로 일행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속담에 ‘평화로운 강물이 맛있는 술을 빚는다’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첫 물결이 만난 것이며 앞으로 영원히 평화롭게 흘러갈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먼곳까지 찾아온 것이 제일 중요하고도 기쁠 뿐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260여명의 양민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해도 한국과 베트남의 우정이 과거를 넘어 그 상처를 이겨낼 것이다.”

다시 발길을 옮겨 우리 일행을 베트남으로 이끈 빈선현을 찾았다. 빈호아사의 우물은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 위원회는 외교적 절차를 이유로 내세웠다.

그런 냉담한 반응은 예견된 것이었다. 430여명의 양민이 희생된 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영국 등에서는 빈선현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학살의 당사자였던 한국인은 한번도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환대와 냉대를 동시에 맞으면서 오히려 베트남의 현실을 냉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환대에 감사하면서도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반성이 따를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환대는 그들의 마음이지만 냉대는 과거 역사의

응어리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일행은 디엔 니엔 양민학살 유적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64명의 양민이 학살되고 단 3명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팜티메오(85) 할머니. “66년 어느 날 이른 아침, 한국군대가 마을로 들어왔어. 그리고는 3명 이상이 모여

있으면 막 총을 쏘며 죽였어. 왜 우리를 죽였는지 몰라.” 당시 한국군은 전략촌으로 주민을 이동시키려 했지만

그곳으로 가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갈 수가 없었다. “사당에 모이라고

했지. 그리고는 수류탄을 터뜨리고 그런 다음 총을 쐈어. 며느리와 손주는 바로 죽었어.” 할머니는 총알이

가슴을 스치며 쓰러졌고, 잠시 뒤 확인 사살을 위해 다가왔던 병사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핏덩이를 보곤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나중에 지나던 소년이 할머니를 주변 미군부대로 데려가 치료를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할머니는 가슴에 깊게 팬 상처자국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상처는 그대로 가슴에

박혔다.

그 사건이 발생한 뒤 주민들은 현장에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학교 앞 조그마한 공터 한쪽에 위령비

(이곳에서는 ‘증오비’라 부른다)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우리의 학살 현장은 선띤현, 빈딘현, 빈선현 등

베트남 중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 주검들은 아무런 위무도 받지 못한 채 증오로 남아 쓸쓸히 비에 젖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머리를 숙였다.

너무 늦었지만 진심으로 그들의 혼령을 위로했다. 어둡고 침침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의 눈빛은

그래도 맑고 까맣다. 그들은 탑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 아이들의 눈빛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내 마음은 그들

눈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그 어린이들에 약속했다. 다시 만나자고.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베트남진료단’을 만들어 베트남을 다시 찾을 것이다.

치과진료뿐만 아니라 언청이와 백내장 치료를 위한 지원사업도 홍보할 계획이다. 베트남에서 언청이와

백내장 치료는 직접 시술보다 지원사업이 훨씬 효과적이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너무 흔한 질병이 된 언청이는

우리돈으로 약 2만원, 백내장의 경우 약 8만원이면 치료받을 수 있다. 언젠가는 그들의 아픈 상처를 위무할

진혼제를 준비할 것이다. 우리네와 너무나 닮은 베트남 들녘에서 조그마한 굿판을 열고 진혼곡을 부를 것이다.

베트남의 안타까운 소식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건치 일행이 다녀온 선띤현을 포함한 쿠앙응아이성 대부분이

최악의 홍수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둘러보았던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한다. 팜티메오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 오 신이여 그들을 돌보소서.

정창권/ 백상치과의원 원장

베트남 시사주간지도 '깊은 관심'

베트남의 시사주간지 <일요 뚜오이쩨>는 최근호(99년 43호)에 <한겨레21>이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 캠페인을 1999년 12월31일까지 벌인다는 기사를 실었다. <일요 뚜오이쩨>는 지난 <한겨레21>

280호에 실린 김종구 편집장의 ‘만리재에서’ 전문과 함께 <한겨레21> 제작진이 100만원(1천만동 상당)을

성금으로 내놓았으며 참전 군인들의 용기있는 증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일요 뚜오이쩨>는 한쪽에도 미치지 않는 원고량임에도 같은 회사에서 발행하는 격일간 신문 광고까지 싣는

등 비중있게 처리했다. 이 보도가 나간 뒤 베트남 독자들은 “한국은 베트남에 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듯하다”, “편집장이 이러한 내용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베트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한겨레21>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등의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호치민=구수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