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베트남 친구 보도안빈에게

사진/김현아/'나와 우리' 대표

한국은 가을입니다. 온 산에 타는 듯 붉게 단풍이 물들고, 길가의 가로수들도 노랗게

계절을 입습니다. 당신의 나라엔 여전히 녹음이 무성하겠지요. 눈동자마저 초록으로

물들일 것 같던 푸르른 산천도, 당신도 모두 안녕한지요.

요즘 한국은 ‘노근리 학살사건’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6.25전쟁중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 진상을 규명하라는 목소리들이 높습니다.

한 법학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록 오랜 시일이 지난 사안이라도

반인도적 집단살해의 경우 인도적 차원에서 가해국이 사과와 배상을 한 사례가 많다.”

집에 남아 있던 그 선연한 총탄자국

사진/지난 4월 퀴논의 타이빈 마을에서 만난 인민위원회 사람들. 가운데가 보도안빈. 맨 왼쪽이 필자

반인도적 집단살해, 양민학살, 동굴 속 주민 떼죽음, 마을 향해 무차별총격….

이런 기사들을 보면서 저는 당신의 나라, 베트남을 떠올립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초록의

나라, 그곳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노근리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면, 지난 봄 내가 만난 그 많은 이야기들의 진실도 밝혀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당신을 만난 건 베트남의 중부지역, 퀴논의 타이빈 마을에서였습니다. “1966년 2월26일

미제국주의자의 지휘 아래 남조선 괴뢰군인에 의해 무고한 양민 320명이 학살당하다.”

그 비문이 새겨진 위령탑이 있는 마을(당신은 그 마을의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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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위령탑에는 죽은 이들의 이름과 나이가 깨알처럼 적혀 있었습니다.

아랫동네, 윗동네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1살에서 70살까지의 베트남 남녀노소가 처연히 그 이름을 남기고

있었지요. 그중에는 당신의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던 그때 당신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결국 당신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유복자이지요. 당신의 아버지도 당신처럼 순하고, 말이 없고,

그저 뒤에서 조용히 미소짓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을까요. 당신의 깊고 검은 눈 속에 스며 있는 어떤 그늘은

살아가는 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까요.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퀴논에서 쿠앙응아이, 다낭으로 올라가는 동안, 크고 작은 마을들엔 한국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위령탑이 있어 한국군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집이나 도로에는 총탄자국이 선연하고, 얼굴 혹은 가슴, 사람들의 몸에는 그날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요.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형제 자매를 잃은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고,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악몽 같은 기억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죽어간

아기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기인 채 그들의 꿈속을 헤매고 있었지요.

생존자 인터뷰라는 명분 아래 그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더군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 그날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놓는 것은 아닐까, 죽은 자식을 되돌려줄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나라의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찾아갔을 때 우리에게 돌아온 건 부드러운

미소와 따스한 인정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이 이곳을 방문한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방문해준 데

대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해서든지

한국 국민들과 세계 각국 친구들이 이 학살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쿠앙응아이성의

빈호아사에서 만난 쿡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분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알리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요.

눈부신 햇살 속에 숨어 있는 눈물들

베트남전쟁중 수많은 여자와 아이와 노인들이, 방어할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이 한국군에 의해 죽어갔다고

당신과 당신의 나라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겠지요. 전쟁중에 ‘중부 각 성에서의 전쟁범죄

조사회의’에서 사례발표를 했던 응엔탄퐁(후에 터이손현 인민위원회 주석)도 말하더군요. “한국 병사들이

빈안사에 몰려와 사람들을 죽였을 때 그곳에는 북베트남군이 없었습니다. 단지 주민들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내 생각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양쪽이 교전중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였다면 그건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학살의 대상이 무고한 양민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군요. 무엇이 진실인지, 가난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던 베트남 마을들에 30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군요. 윌리엄 코인 미 국방장관은 6.25전쟁중 미군의 피난민

대량학살 사건을 수사하고 결과로 어떤 일이 빚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그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햇살이 좋은 가을 오후입니다. 짱짱하던 베트남의 햇빛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나 투명한 햇빛 줄기마다 물기가

스며 있다는 걸 안 건 답사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눈부시게 시린 햇살 속에 배어 있는 습기야말로

당신의, 당신의 부모와 형제 자매들이 흘린 눈물이란 걸 알게 된 것은.

늘 건강하기를,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