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일요 뚜오이쩨>의 후속보도 <한겨레21> 이어 한국군 양민학살 베트남서 최초제기…놀라움 속 모금운동

273호 특집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일요 투오이쩨(젊은이) 봤어요?”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났다. 베트남전 종전 이후 최초로 베트남 언론에서 한국군 양민학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베트남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시사주간지 <일요 투오이쩨> 9월19일자에는
‘잊혀진 양민학살- 생존자들과 함께’라는 제목의 르포기사가 실려 있었다.

“과거를 잊은 건 베트남이었다”

<일요 투오이쩨>는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양민학살 사건의 극히 일부분인 쿠앙응아이성의 빈호아 양민학살

사건을, 그것도 두쪽 분량으로 짧게 다루었을 뿐이지만, 그 기사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엄청났다. 우리가 한국전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피해 당사자들을 제외한 베트남인들이 한국군

양민학살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투오이쩨 신문사로 격려의 전화가 걸려오고,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성금을 보내온 독자들도 있다고 한다.

성금이 답지하게 된 연유는 이렇다. 필자도 소개한 바 있는 빈호아사 커우 마을의 우물가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66년 12월6일 한국군들에 의해 양민학살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당시 한국군들은 다연발총을

갈겨 주민 131명을 몰살시킨 뒤 수류탄을 던지고 볏단과 분뇨 등을 퍼부어 우물마저 덮어버렸다. 이 마을의

유일한 식수공급원인 우물에서는 더이상 예전처럼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지 못한다. 우기 때면 그런대로

사용한다지만 건기가 되면 커우 마을 사람들은 옆마을인 록트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만 한다. 우물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어대고 수첩에 무언가를 적곤 하는 필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만두게, 젊은이. 맨날 사진들은 찍어가면서, 한번 왔다 가버리면 그만이더군. 우리가 정부에 우물 하나만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지가 벌써 7년째야. 하긴 200만동(20만원)이 어디 적은 돈인가.”

최근 이곳 빈호아사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이 마을에 전등을 켤 수 있는 집은 없다. 집까지

전선을 끌어오려면 가구당 100만동을 내야 하는데, 벽촌 살림에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빈호아사

인민위원회 주석 딘키엔은, 이 지역 인구의 37%인 510가구가 극빈층에 속하며, 그중 212가구가 한국군

양민학살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빈곤층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기사가 보도되고 이틀 뒤, 빈호아 지역 르포기사를 쓴 <투오이쩨> 기자 응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과거를 잊은 건 우리들 자신이었지 한국인들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요 투오이쩨>보다 몇주 앞서 <한겨레21>이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투오이쩨>에서는

빈호아사 우물 건립과 초등학교 변전소 설립에 드는 재원(2천만동)을 마련하기 위해 기자들부터 갹출을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투오이쩨>는 <한겨레>쪽에 ‘한국군 양민학살 피해자 돕기’ 공동 캠페인을 벌이자는 제안을 해왔다.

<한겨레21> 273호에 실렸던 한국군 양민학살 기사를 <투오이쩨>에 전면 재게재하고, <투오이쩨>와 <한겨레>가

한국군 양민학살 지역을 동행취재하며, 양대 언론이 동시에 국민성금 모금운동 등을 전개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 응웬이 풀죽은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투오이쩨>에서 제안을 취소했어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그는 말끝을 흐렸다. 현재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로 나아가자”이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한국 정부와의

외교관계, 한국기업의 베트남 투자 유치 등 경제적 이해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신중한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다.

<한겨레21>에 공동캠페인 제안하려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베트남 특별르포-한국군의 양민학살 현장’이라는 기사를 쓸 무렵, 서울에서는 베트남전

참전 고엽제 피해자들의 항의데모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또다시 한국전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인

‘노근리 사건’으로 뜨겁다. 과거 묻혀졌던 양민학살의 문제가 베트남전 당사자인 베트남과 미국, 그리고

참전국가인 한국에서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피해자로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당연히 ‘노근리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와

보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당당한 요구를 위해 베트남에서의 우리의 치부를 이제는 들여다보자.

호치민 / 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