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호감 가는 정치인, 노무현 1위
<한겨레21> 국민 여론조사… 대중이 열망하는 새로운 리더십은 무엇인가

3김 시대 이후의 차세대 리더는 누구일까. 대중이 열망하는 새로운 리더십은 어떤 유형의 것인가.

현재의 정치상황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우선 다음 대선이 치러질지, 아니면 내각제 개헌이 될지부터가 불투명하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내부 권력지도가 안정적으로 그려져 있지도 않다.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3김 시대가 종막을 고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당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정치재개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과연 너의 목소리가 무엇이냐”

그러나 어쨌든 3김 가운데서도 양대 산맥인 YS와 DJ가 잇따라 집권했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에서도 새로운 시대가 열릴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또한 모든 역사는 그 안에 다음 시기 역사의 싹을 배태하고 있는 법이기도 하다.

<한겨레21>은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새로운 싹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했다. 3김씨를 제외한 정치인 가운데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민심의 흐름에 담긴 의미는 또 어떠한 것인가.

이에 따라 실시한 <한겨레21>의 조사에서는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도도한 흐름이 확인됐다.

우선 상위 랭커들의 면면을 보자. 노무현, 이회창, 이인제, 홍사덕, 정동영, 고건, 김민석, 조순, 정몽준, 박근혜, 박찬종, 이해찬……. 뭐가 되든 독자적인 주장, 자기만의 메시지, 컬러를 끊임없이 제시해온 정치인들이 우뚝 올라섰다. 반면에 낡은 계보정치에 매달리거나 보스에 대한 충성 따위를 중심으로 행보해온 인상이 짙었던 정치인들은 모두 20위권 이하로 밀려났다. 과거 또는 현재 권력자의 측근으로 실세 역할을 했는지 따위에 대중은 철저히 무관심했다. 대중에게 의미있는 것은 “과연 너의 목소리가 무엇이냐”였다.

(사진/이번 조사에서 과거 또는 현재 권력자의 측근으로 실세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대중들은 철저히 무관심했다. 국민회의 당무회의.)

이런 결과를 두고 정치평론가 김광식씨는 “상위 랭커들의 공통점은 보스의 눈치를 살피는 봉건적 스타일을 탈피해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온 현대적 인간상들”이라며 “새로운 스타일의 리더십을 지닌 일군의 정치인 그룹이 어느 사이엔가 국민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상위 랭커들의 면면은 정치권의 ‘현실 권력지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이회창씨 정도가 당 총재일 뿐 다른 사람은 당내 입지가 그저 그렇거나 홍사덕, 정몽준씨는 아예 무소속으로 단기필마다. 그럼에도 이런 조사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그들끼리의 여의도 정치’와 국민대중의 민심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권의 빅뱅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대중의 가슴속에 우뚝 선 정치인들의 이력이 대개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과 처절한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노무현(호감도=43.2%, 자질=38.4%)씨는 YS의 통일민주당에 몸담고 있던 90년 3당 합당 때 합류를 거부했다. 그 결과 오랜 원외시절을 보내다 겨우 15대 국회에 재진입했지만 다시 서울 종로라는 ‘편한’ 지역구를 버리고 국민회의로는 ‘적진’이랄 수 있는 부산 출마를 선언했다. 이회창(호감도=36.0%, 자질=41.0%)씨는 대법관, 국무총리 등의 ‘안온한’ 관료의 길을 걷다 권력투쟁의 정글에 뛰어들어 신한국당 대선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이인제(35.1%, 자질=37.9%)씨는 맨주먹으로 대선판에 도전해 500만표를 거머쥐었다.

정동영 김민석은 ‘장기적인 유망주’

(사진/97년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의 대선후보경선. 이회창·이인제 후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번 조사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렸다.)

현대정치에서는 정치권 내부의 세쌓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브랜드와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한층 중요하다. 아칸소라는 시골의 작은 주 지사 출신으로 당내 기반이랄 게 별로 없던 미국의 클린턴이 대중 설득에 성공함으로써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과정만 봐도 그렇다. 대중적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맥락에서 4, 5위권인 홍사덕(호감도=36.6%, 자질=29.7%), 정동영(호감도=38.2%, 자질=27.8%)씨는 미디어 정치의 본질을 누구보다 적확하게 꿰뚫은 인물들로 볼 수 있다. 둘 다 수려하고 깔끔한 용모 등을 타고난 데다 이를 가꾸고 또 가꿨다. 대중매체 소화력도 탁월하게 발휘했다. 6위권인 고건(호감도=32.3%, 자질=31.9%)씨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유 이미지를 관리해왔다.

9, 10위를 나란히 차지한 정몽준(호감도=31.8%, 자질평가=24.7%), 박근혜(호감도=31.6%, 자질평가=23.0%)씨의 브랜드는 독특하다. 정씨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성공신화로 상징되는 기업 이데올로기를, 박씨는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각각 대변한다.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나름대로의 지분을 지닌 동시에 각기 하나씩의 사회적 신드롬을 반영하는 존재인 셈이다.

중하위권에서도 구시대적 계보정치를 벗어나려고 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학규, 이부영, 김근태씨 등은 나름대로 독자적 메시지를 개발해왔다. 그럼에도 이들이 저평가된 것은 역시 ‘자신의 메시지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시장법칙에 철저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도 노력은 하되, 상위권 주자들에 비하면 온몸으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호감도나 자질 평가에서 30% 이상으로 나타난 상위 10걸의 존재는 현실·정치적 의미도 간단치 않다. 여기서 30%라면 국민 10명 중 세 사람이 좋아한다거나 지도자의 자질을 평가한다는 이야기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이 깊은 상황에서 예사롭지 않은 수치다. 여차하면 권력 쟁취를 향한 레이스에서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최소한 정치권의 주요 리더로 성장할 잠재력만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석가들은 그런 맥락에서 노무현, 이회창, 이인제, 홍사덕, 고건씨 등이 1차적으로 다음번 권력경쟁에서 의미있는 변수가 될 것으로 점친다. 당내 역학관계, 권력자의 의중,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요인들 때문에 복잡무쌍한 과정을 거치긴 하겠지만 대중적 평판이 한걸음 우위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강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3김 시대가 종막을 향해 다가간다면 대중적 지지라는 요소의 비중은 좀더 커질 것이다. 상지대 정대화 교수(정치학)는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정치 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정동영, 김민석씨 등은 높은 호감도(정=38.2%, 김=34.2%)에 비해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질평가 점수(정=27.8%, 김=29.8%)는 다소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정치 경력이 워낙 일천함이 반영된 것으로, 이들이 당장 무엇이 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유망주’ 또는 ‘기대주’로 보는 견해가 많은 셈이다. 한 분석가는 “예를 들어 정동영씨는 텔레비전 앵커와 대변인을 하면서 쌓은 깨끗한 이미지가 기본자산”이라며 “이와 동시에 그가 막연하게나마 DJ 이후를 이을 호남의 새로운 대표주자로 투영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내각제 반대세력

<한겨레21>의 조사결과는 1999∼2000년간의 정국 최대 이슈인 내각제 개헌 문제를 전망하는 단서도 일부 제공한다. 우선 최상위 주자군, 그 가운데 특히 노무현, 이회창, 이인제씨 등 사실상의 공동 1위권은 강력한 내각제 반대론자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모두 정치경력이나 당내 입지 등으로 볼 때 내각제가 되면 설자리가 약한 게 사실이다. 또한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대통령직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비치고 있다.

내각제가 된다면 한국정치 풍토상 호남, 충청, 영남권을 축으로 한 지역정치의 완벽한 복원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지역 맹주로서 YS를 포함한 3김씨가 강고한 장악력을 지속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런 흐름은 이번 조사에서 떠오른 새로운 스타들의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치평론가 김광식씨는 “만일 3김씨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손을 잡고 내각제를 추진한다면 이들 신흥 정치리더군이 내각제 저지를 내걸고 연대해 투쟁전선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어쨌든 현재로선 김 대통령쪽도 내각제에 부정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신흥 정치리더군이 한결같이 반내각제 세력이라는 요소도 내각제 개헌이 쉽지 않다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독무대

내각제가 안 돼 대통령선거를 다시 치르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이번 조사결과는 다음번 권력경쟁의 대체적인 지형도를 예고하기도 한다.

<한겨레21> 조사의 상위 10걸을 정당별로 보면 단순 숫자만 쳐도 국민회의가 5명으로 많고, 한나라당이 3명, 무소속이 2명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국민회의쪽에 노무현, 이인제, 고건씨에다 이종찬, 정대철, 이수성, 김근태씨 등 중량감 있는 인사가 많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대중적 평판에서 이회창씨 혼자서 다른 잠재적 경쟁자들을 한참 앞선 결과가 나타났다.

97년 대선 후보 선정과정에서 국민회의는 김대중 총재가 거의 독무대를 이룬 반면에 당시 신한국당은 무려 9명의 후보가 처절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번 조사결과에 따르면 집권당에 인물이 넘치고 야당은 인물난을 겪는 현상이 이번에는 신구 여당이 바뀐 가운데 재연될 수 있는 것이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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