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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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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수’로 남았더라면…

등록 2003-05-30 00:00 수정 2020-05-03 04:23

‘나라종금 게이트’ 주역 김호준은 누구인가…자수성가한 사업가가 금융에 손 대며 몰락하기까지

밑바닥에서 시작해 18개 계열사를 이끄는 거물 사업가로 변신, 그리고 온 나라를 뒤흔들어놓은 ‘나라종금 게이트’의 주역이 되기까지 김호준(44·구속수감 중) 전 보성그룹 회장이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다. 그는 인기가수 서태지에게 자사 의류를 협찬해 한국 최초로 ‘스타 마케팅’을 도입했으며, 1990년대 중반 한국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그가 만든 청바지를 한벌쯤 갖고 있었을 만큼 국내 의류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은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장터국수’에서 보세 옷가게로

초등학교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중학교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그는 중동고로 진학해 4수 끝에 1981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이렇게 형성된 부산-중동고-연세대 인맥이 그의 주요한 로비인맥이 됐다. 대학 때는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1987년 의류업체인 신원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한 김 전 회장은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8개월 만에 그만둔다.

그 뒤 그는 아내가 자신 몰래 보관하고 있던 3천만원으로 ‘장터국수’라는 분식점을 열었다. 테이블이 고작 4개뿐인 조그만 점포였지만 그는 주방과 청소일를 맡고, 아내는 홀에서 서빙을 책임졌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이화여대 앞에서 보세 옷가게를 열었다. 그의 아내는 물건을 고르고 그는 짐을 나르면서 매일 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뛰어다녔다. 그렇지만 “심야에 남대문시장 포장마차에 서서 먹는 칼국수 맛이 너무 좋아서 힘든 줄도 몰랐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사업도 잘되고 손에 돈도 좀 쥐어봤지만 그에게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항상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인 자리였다. 그는 친구들이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 바로 저것이다. 나는 명함이 없구나.” 이때부터 그는 ‘명예롭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궁리하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보성실업이었다.

1991년께 그는 여행 겸 시장조사를 위해 부인과 함께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청바지 브랜드인 ‘겟유스트’를 발견했다. “청바지를 만드는 기술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청바지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당시는 리바이스·캘빈클라인·게스 등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한국의 청바지 시장을 독점하며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사업수완을 발휘해 ‘겟유스트’의 한국 내 독점판매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디자인하고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겟유스트’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금방 선풍적 인기를 끌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게다가 보성은 디자인 개발과 영업에만 주력하고 제품 제조는 하청업체에 맡겨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만드는 상품마다 대히트해 단시일 내 국내시장에서 최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여세를 몰아 그는 영국의 ‘보이런던’(BOY LONDON)과도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매출액이 늘어날수록 로열티도 함께 늘어나 외국기업만 좋은 일 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관행을 깨고 향후 25년간 로열티를 일시불로 지급하겠다고 제안해 단번에 성사시켰다. 드디어 1997년에는 연매출 1500억원을 돌파하며 국내 영 캐주얼 시장을 석권했다. 1998년에는 ‘닉스’ 청바지의 태승트레이딩을 인수하고, ‘야’(YAH) 등의 브랜드를 연이어 내놓으며 계열사를 18개로 늘렸다.

나라종금 살리려 최고 브랜드 세일

단기간에 성공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운이 좋다”거나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 없는 천재는 없다”는 말을 신조로 삼을 만큼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는 소비자를 직접 만나보려고 퇴근 뒤 매장으로 다시 출근했다. 소비자의 바지를 접어주기 위해 바닥에 직접 꿇어 앉았다. 옷 상자를 어깨에 메고 시장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특히 ‘보이런던’의 성공은 당시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렵부터 ‘보이런던’을 입고 방송에 출연하도록 했다. 본격적인 ‘스타 마케팅’ 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당사자였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였다. 보성그룹에서 허약하다고 믿었던 관리 부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은상 부사장을 영입한다. 결과적으로 유씨와의 만남에서 그의 불행은 싹트기 시작했다. 유씨는 입사하자마자 특수 플라스틱 제조 및 가구 판매업체인 (주)세우포리머를 인수하고, 같은 해 6월에는 221억5500만원에 해당하는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등 야심차게 성장위주 정책을 펼쳤다. 이때까지 유씨에 대한 김 전 회장의 신뢰는 전폭적이었다.

그러던 중 유씨는 그에게 나라종금 인수를 건의했다. 당시 종금사가 뭐하는 곳인지, 금융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수익성과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유씨의 말만 믿고 인수를 결정한다. 인수작업 중 환란위기에 대해서도 검토를 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는 가지 않는다”는 정부 발표만 믿고 1997년 11월17일 나라종금 인수계약을 맺어버렸다. 그러나 인수 나흘 만인 11월21일 한국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97년 12월10일 1차로 영업정지됐을 때 나라종금의 인수 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분류한 종금사 4등급 중 나라종금은 ‘증자 여부에 따라 영업재개를 할 수 있는’ 2등급이었다. 660억원을 유상증자하면 영업이 재개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라종금을 살리기 위해 당시 최고의 브랜드였던 ‘겟유스트’, ‘보이런던’, ‘야’, ‘닉스’ 등이 동시에 참여하는 대규모 세일행사 ‘올스타 이벤트’ 등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브랜드 이미지가 하락해 결국 보성그룹 역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라종금이 정상화돼야 보성그룹이 되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금융에 무지했던 김 전 회장은 나라종금을 책임질 전문경영인을 물색하다 결국 유씨의 소개로 안상태 전 대표를 영입한다. ‘나라종금 게이트’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검찰조사 과정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라종금 인수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씨는 인사권 등 나라종금 경영과 관련해 김 전 회장의 간섭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등 나름의 ‘카리스마’를 행사해 김 전 회장의 속을 끓였다. 심지어 김 전 회장이 은행 경력이 있는 동생 효근씨를 나라종금에서 근무하도록 요청한 데 대해서도 안씨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또 나라종금에 대한 독점적 경영권을 확보한 안씨는 김 전 회장의 보성그룹에서 독립해 나라종금의 ‘종합금융그룹화’를 추진하면서 “대주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닉스 통해 재기 꿈꾼다”

김 전 회장은 결국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대신 닥치는 대로 계열사를 늘리고 금융에 손대고 매니지먼트 사업에까지 손을 뻗치면서 ‘재벌 흉내’를 내는, 전형적인 한국 기업가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수’로 쓰러져가는 기업을 살려내기 위해 한광옥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DJ정권의 핵심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로비를 벌이는 자충수를 두게 된 것이다.

그를 조사한 한 수사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은 순진한 ‘옷장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면서 “훌륭한 사업가로 남을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됐다”고 평했다. 그는 분식회계로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나라종금에서 3천억원을 불법 대출받은 혐의 등으로 2심에서 징역 10년에 추징금 30만달러를 구형받은 상태다(1심에서는 징역 4년에 추징금 30만달러가 선고됐다). 그의 선고공판은 오는 6월9일 열린다.

그와 친분이 있는 한 보성그룹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은 동생 효근씨가 맡고 있는 ‘닉스’를 통해 재기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닉스는 현재 보성그룹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내고 있는 계열사다.

김은선 |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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