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소리 다음 원고를 모집합니다.
주제 : 2025년 딱 1%만 더 나아지고 싶은 것
분량 :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 2024년 12월29일 밤 12시
발표 : 제1546호
문의·접수 : leejw@hanien.co.kr
※응모시 메일 제목은 [미지의 소리_이름] 기재, 메일 본문에 [핸드폰 번호]를 반드시 기재 부탁드립니다.
※원고료: 당선작 1편 10만원, 한겨레교육 마일리지 10만 점
※마일리지는 한겨레교육 전 강의 대상 적용 가능합니다.
※마일리지 사용기한 : 적립일로부터 한 달 내
나에겐 소박한 자부심이 있었다. 한강 뷰 아파트를 인생의 꿈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세속적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나는 포섭되지 않겠다는 객기. 그런 가치관이 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자랑스레 여겼다.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 코너는 지나치면서 문학과 사회학 코너에서 골똘히 책을 고르는 내 모습이 좋았다. 고향에서 동생이 서울에 놀러오면 서점에 데리고 가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추천해주며 뿌듯해했다. “솔직히 엄마 아빠도 이런 건 안 해주잖아.” 돈 얘기만 하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동생에게 삶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그 확신을 동력으로 전공도 경영에서 영화로 바꿨다. 좋은 영화를 하나 찾으면, 동기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독의 인터뷰를 찾는 등 영화와 맞닿은 모든 시간을 좋아했다. 그렇게 여러 작품을 만들고 졸업했다.
지금은 취준생이 됐다. 내 연출작 목록과 영화제 상영 이력이 빽빽하게 들어찬 자기소개서를 내밀어도 취업이 쉽지 않았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좋은 작품을 보면서 계속 공부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며칠 전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았다. 칸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잇달아 받은 작품이다. 존경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영화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영화를 보고 그저 그랬기 때문이다. 함께 영화를 본 남자친구는 영화가 무척 좋아 마구 들뜬 얼굴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라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측정하는 건 불가능함을 깨달았어. 그 대신 내가 바라는 미래에는 네가 필요하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너는 예술을 자아실현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사랑하잖아.”
영화가 끝나고 아름다움의 극치라며 흥분한 그 애 앞에서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울었다. 은밀히 감지해왔던 불안이 드러났다. 나는 그와 달리 스스로 지식과 교양, 취향을 자본으로 삼고 있었다. 경제적 자본을 물려받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고 판단한 나는 일찍이 문화 자본에 모든 걸 걸기로 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내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요소로 여겼으리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 그러니까 성공과 경쟁의 수단이 아닌 그 존재 자체를 음미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가장 사치스럽고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한강과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이미지인 한강과 아파트.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한강과 아파트는 성장과 개발의 상징일 테다. 예로부터 한강은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근현대 서울을 완성하기 위해 깎이고 메워진 곳이며, 현재는 거주지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강북’과 ‘강남’의 가름선이 됐다. 아파트는 안락한 보금자리라기보다는 부동산 거래의 수단이 됐다.
한강 뷰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 된 이유는 집 안에서 한강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강 뷰 아파트를 인생의 꿈으로 삼는 사람들과 나는 사실 다를 것이 없다. 누구나 윤택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은 모두 화폐적 가치로 환원된다. ‘취향이 돈이 되는 시대’라는 말은 나에게 낙관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가치의 우열을 매기는 자본이 돼버렸다.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내가 바라는 미래라는 사랑 고백조차 부끄러워졌다. 나의 이상적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그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 나 스스로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면 될 것을. 소박한 자부심은 그저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었다. 떨떠름한 마음의 귀갓길, 전철 너머 빌딩 빛에 반짝이는 한강은 깊고 고요했다.
19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의 주인공 병태 친구 영철은 “돈을 벌면 뭘 하겠느냐”는 물음에 “빨간 지붕 양옥집을 사겠다”고 답한다. 당시 20대의 인생 목표는 2층짜리 단독주택 소유였다. 엠제트(MZ) 세대는 어떨까. 한강변 아파트 꼭대기층 펜트하우스 정도가 공간 욕망의 정점 아닐까. 코인 투자 세계에선 “인생은 한강 물, 아니면 한강 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망하면 한강 물에 뛰어들고, 흥하면 한강 조망 아파트를 갖는다는 뜻이란다.
미지의 소리 9회차 주제 ‘한강과 아파트’의 선정작을 쓴 김가은씨는 “한강 뷰 아파트를 인생의 꿈으로 삼지 않는 걸 자랑스레 여기고”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서 대신 문학과 사회학 책만 고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연인과 영화를 본 뒤 문득 깨닫는다. 나는 문화자본을 경제적 자본의 대체재로 여기는 사람 아닌가. 지식·교양·취향조차 자본으로 여기는, 뼛속 깊이 자본주의를 내면화한 인간 아닌가. “성공과 경쟁의 수단이 아닌 존재 자체를 음미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사치스럽고 어려운 일이 돼버린 현실”을 그는 꼬집는다.
예술적 성취조차 자본의 잣대로 재는 걸 우리는 어색해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과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는 “세계시장을 점령한 우리 문화상품의 쾌거”라고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만 여긴다. 폭력과 야만에 죽음으로 맞서는,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의 작가정신과 문제의식은 뒤로 밀린다. 이런 세태를 볼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소설 대목이 있다.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쓴 ‘그 후’에서 주인공 다이스케는 ‘빵을 위한 노동’과 ‘노동 자체를 위한 노동’을 구분한다.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방편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맞추어갈 것이 뻔하지 않겠나?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내지는 순서가 다른 것의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 할 수 있지.”
김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미지의 소리: MZ는 어떻다, 뭐가 다르다… 이런 구구절절한 제삼자의 평가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MZ 당사자가 말하는 MZ. 4주마다 글을 공모해 심사 뒤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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