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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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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 배제하는 ‘사적 제재 광풍’에 가려진 것

‘사적 제재 무용론’ 설파 앞서 ‘공적 제재’ 담당하는 검경, 법원, 언론 비판이 필요한 이유
등록 2024-06-14 18:32 수정 2024-06-18 21:01
피해자 지원 단체 가운데 하나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유튜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낸 보도자료 일부. 한국성폭력상담소 메타(페이스북) 갈무리

피해자 지원 단체 가운데 하나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유튜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낸 보도자료 일부. 한국성폭력상담소 메타(페이스북) 갈무리


‘피고인들이 고등학생으로 진학이나 취업이 결정된 상태이고, 인격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교화 가능성이 있으며, 충동적 집단심리에 의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점.’

2005년 4월12일, 울산지법 제3형사부(황진효·이현복·정영태 판사)가 피고인 10명 전원에게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리면서 설명한 이유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사이버 레커’(부정적 이슈에 관한 영상을 만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수익 창출 목적으로 ‘밀양 성폭력 가해자 44인의 신상 공개’를 경쟁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대중의 분노가 ‘1차 가해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는데, ‘2차 가해자’인 수사기관, 법원, 언론은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거나 합세해 ‘사적 제재’ 광풍을 부추긴다. ‘사적 제재 무용론’을 설파하기에 앞서 ‘공적 제재’를 담당하는 사법시스템과 언론에 대한 점검과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그들은 여전히 사법시스템의 일부

‘피해자 인적사항 누설, 여성경찰 조사 요구 묵살, 범인식별실 미사용, 진술녹화 미활용, 가해자 가족으로부터 미보호, 밤샘조사, 식사 및 휴식시간 미제공, 피해자 비난 발언’. 피해자 가족에게 약속한 ‘비공개 수사’를 전면 뒤집은 경찰이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저지른 인권침해다. 가해자 41명과 그 가족이 있는 장소에서 한 번에 7~8시간씩 총 9차례 조사받아야 했던 피해자에게 경찰 수사는 어떤 상흔을 남겼겠는가. 해당 경찰들은 징계 또는 인사조처 대상이 됐으나, 인사비리 의혹으로 사표를 낸 당시 울산경찰청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현직에서 경찰 일을 이어갔다고 한다.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경찰의 피해자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검찰도,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동생과 짠 것 아니냐’ ‘왜 밀양에 가서 피해를 당했느냐’며 피해자 비난하기에 동참했다. 요란했던 홍보와 달리 피의자 44명 가운데 10명만 기소하는 등으로 사건을 축소했다. 검찰은 재판에서도 소극적이었고 재판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피고인 전원을 소년부에 송치한 결정에도 불복(항고)하지 않았다. 관련 검사들도 검찰, 법인 등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다.

피고인들의 범행이 수사·기소 과정에서 축소된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점을 고려하더라도, 가해자들이 저지른 일은 재판부가 판단한 것처럼 우발적인 범죄가 결코 아니었다. 재판부의 선처는 피고인들에게 자신들의 범행이 가벼운 것이라는 인식을 줬고, 이는 가해자들이 반성하지 않는 현재와도 연결된다. 또 피해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은 몰이해와 편견을 바탕으로 한 2차 가해였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들과) 사건 진행 중에도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이후 합의했으며, 현재 충격에서 벗어나 평온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중학생이던 피해자가 집단성폭력 사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재판부가 피해자 의사를 전면에 내세워 형량에 반영한 건 가정폭력범인 친부의 강요에 의한 합의가 전부다. 피해자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활자’에 불과하다는 법원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점이다. 세 명의 판사도 현직 판사로, 부산 지역 법인 변호사로 여전히 사법시스템에 기생하고 있다.

보도자료 베끼기 이어 ‘사이버 레커’ 받아쓰기

형식적으로는 사법시스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피해자국선변호사제도가 도입됐고, 수사관의 인권침해를 방지하거나 책임을 묻는 각종 제도적 보완이 이어졌다. 피해자의 재판 절차 참여권을 보장하고, 수사·재판 기록에 대한 정보 접근성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더딘 변화를 두고 생색내기에는 ‘2차 가해자’들의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들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는가. 왜 그들이 소속된 기관에서는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가. 왜 ‘사적 제재는 위험하다’는 주장만 반복하는가. 왜 수사와 재판이 가해자에 대한 ‘응보’는 물론이고, 피해자의 ‘회복’에도 기여하지 않는지에 대해선 침묵하는가.

이들의 침묵은 언론의 동조로 유지된다. 20년 전, 경찰이 보도자료에 피해자 특정이 가능할 정도의 정보를 포함해 기자들에게 배포했을 때 언론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기사를 마구잡이로 내보냈다. 피해자 가족이 언론사에 정정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언론은 경찰 보도자료가 아니라 사이버 레커의 유튜브 내용을 검증 없이 받아쓴다. 언론이 사이버 레커와 협업해 ‘사적 제재’를 하나의 오락 콘텐츠로 만드는 것이다. 피해자 동의 없는 폭로를 사이버 레커가 이어가고, ‘정의 구현’을 내세워 피해자 요구를 묵살하는 대중이 생기는 것은 언론의 조력 때문이다. 언론의 이런 행태에 대한 자성은 드물게 보이고, 사법시스템을 정조준한 비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20년 전 피해자를 조력한 단체 중 하나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피해자 동의를 받았다’는 유튜버 말이 거짓임을 밝혔음에도 유튜버들은 경쟁적으로 피해자 의사를 내세워 가해자 신상이나 판결문 속 범죄사실 공개 등을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 동생이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려 폭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번엔 ‘대중’이 ‘알 권리’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직접 나서거나 아니면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사건 당시 피해자를 직접 조력했던 단체나 활동가, 변호사 등에게도 ‘너희들이 한 게 뭐가 있느냐’라고 되묻는다. 그 대중이 원하는 게 과연 무엇인가. 정작 피해를 본 당사자들은 또 다른 고통에 빠져 있는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제재하고 있는가. 지금이야 가해자 신상을 릴레이로 공개하면서 온라인 자경단이 된 듯한 입장에 취해 있지만,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한공주>나 <귀향>의 개봉 당시, ‘엑기스, 하이라이트, 몇 분, 시간대’ 등의 검색어가 각종 ‘남초’(남성 이용자가 많음) 및 영화 사이트에 오르내리던 게 한국 사회다. 그 ‘대중’은 1차 가해자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법시스템과 언론의 반성·변화를 촉구한다

공론화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일명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사건’의 피해자 김진주씨가 소환된다. 그러나 정작 진주씨는 공론화에 신중한 입장이다. 사적 제재보다는 공적 제재가 제대로 되길, 사람들이 피해자의 피해 복구와 일상 재구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동참해주기를 바란다. 시원하게 욕하면 그만인 제삼자와 달리 피해자는 그 피해를 안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스템과 언론의 역할·책임을 묻는다. 시스템이 적절한 ‘응보’를 기반으로 ‘회복’에 기여하길 바란다. 언론이 사실 확인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길 바란다.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시스템이 무너질 경우 피해자, 약자, 소수자가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본다. 사적 제재의 한계는 그와 연결된다. 피해자들에게 시스템을 신뢰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 우선 공적 제재를 담당하는 기관, 이를 분석·전달하는 언론의 반성과 변화를 촉구한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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