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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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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색만 갖춘 차별 금지 [2022 장애인 인권 판결]

디딤돌 걸림돌 판결 외 주목할 만한 판결들
등록 2022-05-02 13:14 수정 2022-05-04 02:24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법원은 소수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다.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해,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해, 비장애인과 다르게 차별 대우를 받아, 장애인들은 끝내 법원을 찾는다. 시민단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15년부터 해마다 장애인 인권에 디딤돌·걸림돌이 된 판결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재판을 통한 장애인의 권리 구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사법 모니터링’이다.
2022년에는 2021년 선고된 민사·행정 분야 판결문을 대상으로 4개월여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변호사 32명이 2021년 1~12월 ‘장애’라는 단어를 언급한 전국 법원의 판결문 240개를 모았다. 그중 판결문 77개를 선별하고(1차 선정) 다시 판결문 16개를 추려냈다(2차 선정). 선정위원들은 세 차례 회의 끝에 디딤돌 판결(5건), 걸림돌 판결(2건), 주목할 만한 판결(7건) 등 모두 14개의 판결을 선정했다. 주목할 만한 판결은 디딤돌 판결보다 그 의미는 덜해도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판결이다. 권건보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동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 서동후 변호사, 이주언 변호사, 이호선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외래교수, 정제형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 표경민 변호사 등 장애인 인권 분야 전문가 8명이 머리를 맞댔다. <한겨레21>은 선정된 판결과 그 의미를 정리해 전달한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5월 중에 ‘2022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열 계획이다.
주목할 만한 판결①



휠체어 탄 승객만 다른 쪽 보라고 한다면 (대법원 2018다203418)

“장애인을 버스에 탑승시키라고 하니 형식적으로 만들어만 놨구나 생각했죠. 블록을 끼워넣듯이 사람을 일단 공간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줄 안 거 같아요.”

장애인이동권연대에서 활동하던 김영수(68)씨가 2016년 2층 광역 시내버스(좌석형)를 탔을 때다. 휠체어 좌석을 모니터링하러 버스에 올랐는데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휠체어 좌석의 공간은 버스 진행 방향으로 0.97m, 출입문 방향으로 1.3m로, 일반버스와 다르게 휠체어가 버스 진행 방향이 아닌 측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휠체어 회전 반경조차 고려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나 모습은 정면을 바라보는 승객들의 시선에 노출됐다. 박씨는 버스회사를 상대로 교통약자용 좌석을 개선하고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다.

원고 전부 패소한 1심, 원고 전부 승소한 2심까지 엇갈린 하급심을 거쳐 2021년 4월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김씨 손을 들어줬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교통약자법을 살펴보면, 저상버스뿐 아니라 2층버스 또한 교통약자용 좌석을 설치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좌석의 길이는 버스 진행 방향을 기준으로 측정해야 한다.

버스회사는 다른 승객과 좌석 방향은 달라도 법이 정한 공간은 확보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다르게 대우하는 것, 즉 휠체어 이용 승객만 버스 진행 방향으로 앉지 못한 채 버스를 이용하게 하는 건 차별이 맞는다고 확인했다. 2008년 4월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대법원이 처음 심리해 받아들인 사건이다.

다만 대법원은 버스회사의 차별행위에 고의나 과실은 없다고 보고 원심의 위자료 지급 명령 부분만 파기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관련법에 좌석 측정 방법이 명시돼 있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의 지적도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고의나 과실이 없음을 쉽게 인정해 차별행위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이호선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외래교수)

주목할 만한 판결②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 3%만 하라? (서울고법 2018나2001559)

청각장애인 인권 침해를 다룬 영화 <도가니>를 막상 청각장애인은 볼 수 없었다. 2016년 박승규씨 등 시·청각장애인 4명은 씨지브이(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대형 영화상영관 세 곳을 상대로 화면 해설이나 자막을 제공하라는 차별구제 청구 소송을 냈다. “영화의 명장면, 명대사를 비장애인과 동시에 같이 이해하고 즐기고 싶다”는 장애인의 탄원서가 잇따라 법원에 제출됐다.

서울고법 민사5부(재판장 설범식)는 2021년 11월 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300석 규모 좌석을 가진 상영관 등 일정 규모 이상 영화관은 필수적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라고 밝혔다. 다만 화면 해설이나 자막이 스크린에 뜨는 개방형 상영 방식과 개인이 가진 수신기기로 송출되는 폐쇄형 상영 방식 중 하나를 영화관이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배리어프리 영화의 상영 횟수를 전체 상영 횟수의 3%로 못박는 등 1심 판결에 견줘 일부 후퇴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상영업체가 매일 조조영화로만 배리어프리 영화를 배정하면 장애인의 영화 관람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장애는 신체적 손상과 사회적 환경이 결합한 결과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의학적 관점에만 기대어 장애를 판단하지 말라고 권고한 바 있다.

주목할 만한 판결③



장애가 후천적이든, 선천적이든 (청주지법 2019구합908)

지능지수 67인 ㄱ씨는 2019년 2월 지적장애로 장애인 등록을 해달라고 지자체에 신청했다. 그는 태어난 뒤 호적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17년 만에 가족을 찾았고 다시 수십 년이 흘러 뒤늦게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나 국민연금공단의 심사 결과를 받아든 충북 청주시는 그의 지적장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 없다며 장애 미해당 결정을 내렸다. 이에 ㄱ씨는 청주시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다. 청주지법 행정1부(재판장 김성수)는 청주시 처분이 잘못됐다고 봤다. 의사의 감정 결과나 사촌 언니 증언 등을 종합하면 ㄱ씨는 법에서 정의한 지적장애인이 맞는다는 것이다. “장애의 원인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원인을 알 수 없든지와 상관없이 신청 당시 법이 정한 장애인 기준에 부합한다면 장애인에 해당된다.”

주목할 만한 판결④


능력장애 상태를 우선 고려하라 (인천지법 2018구합55344)

중증의 조현병을 앓던 정신장애인 ㄴ씨가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린 인천시 결정에 “장애를 너무 경미하게 판단해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 인천지법 행정1-3부(재판장 김석범)는 인천시 결정이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정신장애의 경우 정신질환 상태와 능력장애 상태에 대한 판정을 종합해 내리되 능력장애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능력장애는 청결유지, 대인관계, 금전관리능력 등을 기준으로 측정된다. 그러나 인천시는 능력장애를 살필 만한 충분한 자료를 쥐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의료적인 기준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여러 양상을 종합해 당사자의 장애를 판단해야 한다. 의료적 관점에 얽매인 행정 편의주의적 처분을 경계한 판결들이다.”(김동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

주목할 만한 판결⑤



고 변희수 하사 강제전역 취소 판결, 그 너머 (대전지법 2020구합104810)

군 당국이 고 변희수 하사의 성전환 수술 결과(음경상실, 고환결손)를 심신장애로 보며 현역복무에 부적합하다고 강제전역 처분을 내려 논란이 됐다. 2021년 10월 대전지법 행정2부(재판장 오영표)는 변희수 하사에 대한 군의 강제전역 결정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변 하사 성별은 여성이 맞기 때문에 남성을 기준으로 한 심신장애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인권 침해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는 판결이다. 다만 성전환 수술로 인한 결과를 심신장애로 인정할지로 쟁점이 좁혀지면서 심신장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장애인은 전적으로 현역복무에 부적합한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주목할 만한 판결⑥



장애인 통제하는 ‘약물 오·남용’이란 관행 (광주지법 2019가단541365)

자폐증이 있는 정신질환 1급의 ㄷ씨는 급성췌장염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고 협조하지 않는 등 자해할 위험이 있다며 그의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세 차례 정맥주사를 놨다.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약물이었다. 급격히 상태가 악화한 ㄷ씨는 결국 숨졌다. 유가족은 담당 의사의 잘못된 의료 행위로 ㄷ씨가 숨졌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소. 법원은 의사의 의료 행위에는 문제가 없고 피해자의 사망과도 무관하다고 밝혔다. 판결문 내용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소리를 지르고 협조가 안 되면 자해 위험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손발을 묶었다면 그 위험성이 낮아졌을 텐데 부득이하게 주사까지 놓아야 했을까. 발달장애·정신장애인을 통제하기 위한 약물의 오·남용이 관행처럼 존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주목할 만한 판결⑦
발달장애인이 쓴 차용증, 그 불완전함에 대해 (울산지법 2020가단114794)

지적장애인 ㄹ씨는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렸다. 그러나 빌린 돈보다 238만원을 더 갚았는데도 계속해서 빚 독촉을 당한다며 법원에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냈다. 법원은 차용증서, 공정증서 등을 그가 직접 작성한 이상 그 문서의 효력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발달장애인(지적·자폐장애인)은 금전 거래를 할 때 불완전한 의사결정을 할 위험이 존재하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뒤늦게 법원의 문을 두드리곤 한다. 그러나 법원의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그 효력이 인정되거나 부정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진다. 장애인 관점에서 법률행위의 맥락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 전문심리위원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특집 - 2022 장애인 인권 판결


법은 장애인 앞에 평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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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있는 그대로 고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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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색만 갖춘 차별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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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장애는 가해자의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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