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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2차 가해자들

등록 2022-01-29 10:32 수정 2022-01-30 01:47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김지은입니다>는 2020년 3월 출간되었다. 저자인 김지은씨와 조력자들, 출판사의 용기로 어렵게 나온 책이었지만, 대형 온라인서점에서 ‘광고 불가 도서’라며 배너광고 게재를 거절했을 만큼 출간 후 상황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실이 폭로된 이후 2년간 분노해온 나조차 정작 그 책을 읽을 용기가 없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고통의 시간, 그를 향했던 한국 사회의 야만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온라인에서는 김지은씨를 비난하는 말이 다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악의를 견디기 힘들어 눈감아버리느라 피해 생존자의 이야기마저 외면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고통의 기록을 넘어서

두 달 뒤, 한 여성의 기운찬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김지은입니다> 읽으셨어요?” 그는 내가 일 때문에 찾아간 지역 여성단체의 활동가였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가 사무실을 오가는 모든 회원과 활동가를 붙들고 “<김지은입니다> 읽었어? 얼른 읽어! 독서모임 하게”라고 열 번쯤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조금씩 용기가 차올랐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본, 김지은씨를 향해 모욕적 발언을 일삼는 중장년층은 세상 전부가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에 진을 친 악플러들도 있지만, 어딘가에서 김지은씨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거나 설득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덕분에 <김지은입니다>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했던 것과 달리, 그것은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려 분투한 사람이 남긴 승리의 기록임을 알게 되었다.

2022년 1월16일, MBC 시사 프로그램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와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 이아무개 기자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미투 터지는 게 다 돈 안 챙겨주니까 터지는 거 아니야” “난 안희정이 불쌍하더구먼 솔직히. 나랑 우리 아저씨(윤 후보)는 되게 안희정 편이야” 같은 김건희씨 말에, 지난 4년여간 김지은씨를 모독하며 바닥을 드러낸 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그처럼 노골적인 2차 가해 발언이 방송될 경우 김지은씨가 다시 피해당할 수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제작진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 후 나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 것은 김건희씨처럼 ‘흔한’ 패턴을 반복하는 2차 가해자보다 윤 후보를 ‘전략적 지지’한다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김씨의 발언에 관해 ‘미투 얘기만 빼면 괜찮다’거나 ‘그 나이대 분들은 원래 다 그렇다. (그러니 그냥 좀 넘어가라)’라는 식으로 축소해석하려 애쓴다. 이들의 놀라운 점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과 그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영 논리에 따라 피해 생존자를 향한 존중의 무게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전략을 논하기 전에

김지은씨는 김건희씨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며 말했다. “당신들이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노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말아주십시오.” 이처럼 여성의 인권이 계속 끌려나와 진흙탕에 내팽개쳐지는 대선 국면에서 자칭 ‘전략적 지지자’들이 원하는 세상의 모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최소한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가 계속 고통받지 않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전략을 논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은 피해자에 공감하고 2차 가해를 비판하는 일 아닐까. 그러지 않겠다면 그냥 ‘변화의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지 직시하고 인정하거나.

최지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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