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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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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호소하니 “치매”라고 했다

5년 새 44% 늘어난 노인 대상 성범죄… ‘수치스러운 일’ 고통 딛고 신고해도 사회적 편견 앞 절망
등록 2021-10-25 11:04 수정 2021-10-25 23:42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2021년 3월 70대 여성이 친인척 관계인 80대 남성의 옛집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2020년 8월 그 남성에게서 성폭력을 당했고 이웃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가해자 가족이 피해자를 치매, 정신질환자로 몰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피해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가해자의 집에서 목매어 죽으면 한이 풀릴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 말대로 가해자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 가족은 뒤늦게 경찰서에 고소했으나 성폭력 시점에서 상당 기간이 흘렀고, 피해자는 사망한데다 가해자가 완강히 혐의를 부인해 결국 불송치 결정이 내려졌다.

피해 인지 힘든데다 자책하기도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독거노인 수가 늘면서 노인 대상 성폭력 범죄도 해마다 증가 추세다. 이에 대해 각 지방자치단체, 자치경찰 등에서 대응책을 마련 중이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사이 피해자는 사망하거나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내쫓기듯 벗어나고, 신고·고소를 해도 추가 피해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5~2019년 총 3442건의 노인 대상 성범죄가 발생했는데, 5년 사이 범죄 건수가 44.2% 늘었다. 범죄 유형별로 보면 강간·강제추행이 92.5% 정도를 차지하며, 불법촬영이 2.8%, 통신매체 이용 음란이 3.7%라고 한다. 2020년 경찰청 발표 자료에 따르더라도 60살 이상 노인 대상 성범죄에서 강간·강제추행만 777건으로 전 연령대 강간·강제추행 피해 건수에서 3.3~3.8%를 차지한다. 그러나 수사기관 통계로만 노인 대상 성범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연령대의 특성상 신고·고소에 소극적이거나 취약할 것임을 고려하면 실제 성범죄 표적이 되는 노인은 훨씬 더 많다고 봐야 한다.

성범죄 표적이 된 피해자는 성폭력을 당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예를 들어 신체장애와 치매 등)에서 피해 인지가 어렵거나 둔할 수 있고, 가부장제도하에서 살아온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외부에 알릴 수 없는 일로 여기거나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설령 피해 사실을 인지했더라도 여성 노인을 무성적 존재로 인지하는 사회적 시선 탓에 그 사실을 외부로 알리는 것을 어려워하며, 이를 알리거나 신고·고소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2차 가해’에 고스란히 노출되리라고 생각해 포기한다.

노인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면 피해 사실에 대해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침해당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고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부정 등으로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해·자살 등을 시도하거나 신체적·정신적 건강상태가 단기간에 악화되기도 했다.

‘젊은 남성이 노인을 성폭행했겠는가?’

노인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는 1인 가구다.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독거노인은 각종 범죄의 표적이 된다. 여성 독거노인은 연대나 지지 기반이 취약하고, 신고·고소로 나아갈 여력이 없으며, 신체적으로 제압하기 쉬울 것으로 보이기에 성폭력 피해를 입는 일이 많다. 특히 방범 장치나 치안 시설이 미비하고 공동체의식이 강한 농촌에선, 가해자가 피해자를 물색하고 범행을 계획하는 데 용이해 피해자가 반복해서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연쇄적인 성범죄가 일어나기 쉽다. 실제 농촌의 성범죄 검거율은 75%로, 도시(84%)보다 낮다. 물론 도시 지역이라 하더라도 독거노인 증가 등으로 취약계층 노인 성폭력 피해가 늘고 있다. 그 외 건강 악화로 병원·요양원 등에 입원한 노인 역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된다.

가해자의 연령은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흔히 피해자인 노인보다 젊은 가해자를 상상하지 못하는데, 최근 발생한 노인 대상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대개 30~50대 남성이었다. 성범죄 가해자의 연령대가 매우 다양함에도 노인 성폭력 피해자가 외부에 피해 사실을 알리면 가해자는 모든 연령대에서 이해받는 반면, 피해자는 꽃뱀·치매환자 등으로 몰려 고통받기 일쑤다. 젊은 남성 가해자의 경우 노년의 피해자를 성폭행할 개연성이 있겠느냐며, 노년의 남성 가해자의 경우 강간·강제추행 등을 위해서는 피해자를 제압할 힘이 필요한데 성폭력을 저지를 힘이 있겠느냐며 피해자를 의심한다.

피해 인지와 피해 사실에 대한 구체적 진술을 위해서는 노인 피해자 주변인(가족·지인·의사·요양보호사 등)의 도움이 절실한데, 1인 가구의 경우 그 기반마저 취약하기에 신고·고소를 포기한다. 설령 본인 의지나 주변 도움으로 신고·고소를 해도 진술 과정에서 노인 성폭력 피해자의 신체·정신적 취약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수사로 상처를 입는다. 장애 있는 노인 피해자를 수차례 불러 진술을 강요하거나, 피해자 보호 및 지원 제도 등에 대해 정보접근성이 낮은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고 아예 알려주지 않는 사례도 경험했다.

2012년 30대 남성 간호조무사에 의한 환자 성폭력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신체 건강한 30대 남성이 뭐가 아쉬워서 60대 여성을 성폭행하겠는가’라는 의문을 푼다면서 범행 장소에 피해자를 데리고 가서 현장검증을 하며 범행을 재연할 것을 강요했다. 경찰은 검찰에 구속영장을 수차례 신청했지만 검찰 역시 ‘젊은 남성이 나이 든 여성을 성폭행했을 개연성이 과연 충분한가’라며 세 차례나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청구한 구속영장 역시 법원에서 기각됐다. 그 과정에서 수사기관에 수차례 불려나가야 했던 피해자는 외부에서 떠도는 헛소문에 맞서야 했고, 결국 죽음으로 몰렸다.

최근 전남자치경찰위원회는 전남경찰청 노인 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 대책 등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제1호 시책이 ‘어르신 범죄피해 예방 종합안전대책’이었고, 이어 성폭력에 초점을 맞춘 대책을 마련했는데 바로 노인 대상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다. 노인 대상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인지하고 신고·고소 등을 하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외부 기관이 찾아가는 형태로 범죄 대응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인데, 이 대책이 다른 지역에도 생기기를 바라는 것과 동시에 2015년 목포지청의 ‘노인 성보호 상담·신고센터’처럼 유명무실해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것이다.

장애노인 불러 진술과 현장검증 강요도

임선애 감독의 <69세>와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라는 두 편의 영화는 모두 60대 여성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선택한 두 여성 피해자의 모습을 보며 그 싸움마저 포기하거나 싸움해볼 엄두조차 못 냈던 많은 피해자를 생각한다. 영화 <69세> 속 사건과 닮은 2012년 사건의 경우, 당시 30대 남성 간호조무사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021년 현재 41살로 이 사회에 복귀해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 피해자의 삶은 유서 5장과 함께 2012년에 머물러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처럼 피해자 개인에게 사건 처리를 맡기는 비겁한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사회의 의무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너머n’ 아카이브(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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