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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에 체하는 시대에 부침 [언론비평]

언론 비평이 언론 개혁이 아닌 언론 ‘혐오’의 도구가 된 시대, 언론 비평의 복원을 위하여
등록 2021-03-02 23:56 수정 2021-03-03 02:55
2021년 2월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언론중재법 개정법률안의 쟁점: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2월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언론중재법 개정법률안의 쟁점: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다시’ 언론이 문제입니다.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세계 주요 국가 중 꼴찌라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뉴스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검찰 개혁 다음은 언론 개혁”이라 외치고, 여당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만지작거립니다.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이 갈라져 싸우던 자리에서 이제 언론과 시민이 다투고 있습니다.

한 세대 만에 대중화된 언론 비평

대한민국에서 언론이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있냐고요? 맞습니다. 당리당략에 정신이 팔려 사실을 왜곡하고 오보를 남발하는 언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합니다. 돈 많은 기업 앞에선 더없이 관대하고 힘없는 약자 앞에선 누구보다 엄격한 모습도 낯익은 풍경이지요. 포털 사이트에 질 낮은 뉴스를 마구잡이로 올리는 언론은 또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언론이 문제’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처음 던진 이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였습니다. ‘논객’ 강준만이 언론 개혁의 깃발을 들고 <조선일보>를 비판하며 ‘언론 비평’을 시작한 게 1990년대 중반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언론 비평이 본격화한 지 어느덧 한 세대가 지난 겁니다. 갓난아기가 어른이 된 셈이지요.

그동안 언론 비평은 얼마나 발전했을까요? 몸집은 분명히 커졌습니다. 바야흐로 언론 비평의 전성시대입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에는 언론을 비판하는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도 언론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과거에 언론 비평은 오로지 소수 전문가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전 국민이 언론 비평가입니다. 언론 비평이 말 그대로 대중화됐습니다.

그러나 언론 비평이 양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질적으로도 성숙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기자회견 때 질문한 기자의 손가락 모양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모독의 메시지 아니냐는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해당 기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비난과 욕설의 댓글이 달렸지요. ‘한경오’(한겨레·경향·오마이뉴스)로 대표되는 진보언론을 향한 비판이 쏟아졌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이들 언론이 문 대통령에게 적대적이라면서, 그 이유가 기자들의 학벌주의 때문이라는 등의 억측이 떠돌았습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에서 인기를 끄는 ‘사이다’ 비평은, 지지하는 정파에 유리한 보도를 하면 ‘참언론’으로 떠받들고, 불리한 보도를 하면 ‘기레기’로 매도합니다. 확인된 사실보다 추측과 음모론을 근거로 언론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는 기자의 신상을 털거나 좌표를 찍어 ‘조리돌림’하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문제의 원인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해법을 찾기보다는, 언론을 청산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엿보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그간 한국 사회에서 언론 비평은 언론 개혁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독재권력에 부역했고 민주화 이후 그 자체로 권력이 된 언론을 민주주의와 시민의 편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언론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바로 세우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언론 비평은 언론 개혁이 아닌 언론 ‘혐오’의 도구가 되어갑니다. ‘우리 편이 아닌’ 언론을 파괴하고 기자를 공격하는 데 열중합니다. ‘흉기’가 된 언론과 싸우다 언론에 대한 감시와 견제마저 흉기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언론 비평은 왜 언론 혐오로 변질했을까요? 저는 언론을 구성하는 두 축인 시민과 기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한쪽 눈을 가린 채 입체적인 언론의 모습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론을 혐오하는 시민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합니다. 심증만으로 만들어낸 ‘가상현실’ 속 언론에 헛주먹질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뉴스가 생산되는 현장과 괴리된 상태에선 언론의 생리를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언론의 속성과 구조를 따져보지 않으면, 눈 감고 만진 꼬리를 몸통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할 뿐입니다.

기자들은 언론 비평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정파성에 매몰된 시민이 왜곡된 시선으로 부당하게 자신들을 폄훼한다며 억울해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공급자 중심의 폐쇄적 시각과 시대착오적 관행에 머물러 있음은 보지 못합니다. 기자들이 비판에 귀를 닫고 있으니 언론의 변화는 무망합니다. 시민의 불만이 커지고 표현 방식이 과격해지는 데는 이런 기자들의 태도 탓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내 목소리만 메아리치는 반향실(Echo Chamber)에 끼리끼리 모여 고함만 지른다면, 기자와 시민은 결국 언론 혐오와 민주주의 퇴행이라는 참혹한 결론의 공범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자와 시민 사이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고 이해를 돕는 가교가 필요합니다. 언론의 잘못은 따끔하게 비판하되 혐오하지 않는 균형 잡힌 비평 말입니다.

불편함이 불편할지라도

언론에 관해 말하는 이 지면에서 저는 언론 ‘혐오’를 넘어 기자와 시민을 잇는 ‘비평’을 복원하려 합니다. 언론계 최근 이슈와 취재보도 현장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느 비평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원칙을 지키려 합니다.

첫째, 확인된 사실과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비평입니다. 언론 개혁은 ‘뇌피셜’이나 ‘카더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무기는 이성적 비판입니다.

둘째, 누구 편도 들지 않겠습니다. ‘너는 여당과 야당 중에, 기자와 시민 중에 어느 편이냐’는 질문은 사양합니다. 정파적 유불리에 대한 고려를 최대한 멀리하겠습니다.

셋째, 언론에 대한 애정을 담은 비판입니다. 혐오는 상대를 바꾸지 못합니다. 언론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건 애정을 담은 쓴소리입니다. 기자나 언론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언론이라고 하는 제도에 대한 애정입니다.

어느 편도 들지 않는 불편(不偏)함은 모두에게 불편(不便)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사이다’가 아니라 ‘고구마’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얘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장담하건대, 가슴이 좀 답답해지더라도 사이다보다 고구마가 건강에 좋습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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