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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상식을 받아들일 기회

등록 2021-08-14 02:09 수정 2021-08-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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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때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로 기소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가 2021년 8월12일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박연욱)는 1심과 같이 “부적절한 재판 관여 행위”라고 밝히면서도 “월권행위”라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2심이 부적절한 재판 관여 행위라고 지목한 사건은 임성근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가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요구로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에 개입한 일입니다. 임 수석부장판사는 2015년 이 사건을 맡은 이동근 부장판사에게 재판 때 기사의 허위성을 분명히 밝히고, 선고 때 읽을 선고 내용과 판결문의 판결 이유를 일부 수정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예컨대 재판에서 ‘세월호 사건 당일 정윤회가 대통령을 만났다는 소문은 허위인 점이 증명됐다고 밝히라’거나 선고에서 ‘외교부에서 가토 다쓰야에 대해 선처를 바라고 있다고 언급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동근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재판 개입 사실은 부적절하지만 형법상 ‘직권남용’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2심은 밝혔습니다. 직권남용이 되려면 남용할 ‘직무권한’이 존재해야 하는데, 임성근 전 부장판사가 형사수석부장판사라고 하더라도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의 권한이 없기 때문에 ‘직무권한의 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직권’이 없으면 ‘남용’도 없다는 형식논리입니다. 오직 권한 범위 내의 ‘재량권남용’만 직권남용죄로 인정될 뿐이고,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행위는 그것이 불법이라도 직권남용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권한이 있는데 남용한 것보다, 권한이 없는데 남용한 것이 더 크게 잘못한 일이라는 게 국민의 상식인데 단순한 형식논리에 갇힌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도 그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김성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직권남용을 ‘남용’에 초점을 맞춰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A, B 두 사람의 건물 관리인이 건물 출입을 위한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지만 관리인 A는 1·2·3호실 출입 권한만 부여받았고, 관리인 B는 4·5·6호실 출입 권한만 부여받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A가 자신이 가진 키를 사용해서 4호실을 몰래 출입했다면, A는 4호실 출입 권한 자체가 없으므로 A는 권한‘남용’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게 과연 남용이라는 용어의 용례에 맞을까? 남용 개념의 기본적 의미를 고려하면 형법의 직권남용은 권한 범위 내 ‘재량적 남용’뿐 아니라 권한 범위 밖의 일(명령, 지시 그 밖의 불법적인 사실행위)을 하게 하는 ‘월권적 남용’도 포함할 수 있게 된다.”(참여연대 판결비평 사법농단 특집① 사법농단과 직권남용… 다시금 시험대에 오른 법관의 독립성)

법원이 권한이 아니라 남용에 초점을 맞춘 국민의 상식을 받아들일 기회는 이제 단 한 번 남았습니다. 대법원(3심)에서 바로잡는 것을 포기한다면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탄핵 심판을 진행 중인 헌법재판소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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