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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살아남은 ‘사실을 말한 죄’

등록 2021-03-01 13:19 수정 2021-03-0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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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2월25일 사실을 말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처벌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합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형법 제307조는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원칙적 금지)고, 다만 제310조는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예외적 허용)고 돼 있습니다.

합헌 의견(법정의견)은 재판관 9명 중 5명이 냈습니다. 이들은 표현의 자유가 다소 제한되더라도 개인의 명예(인격권)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 무게중심을 뒀습니다. △명예훼손적 표현이 유통되는 경로가 다양해져 그 피해가 커지고 △징벌적 손해배상이 없어 민사소송으로는 명예훼손 예방 효과가 적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사라지면 병력·성적지향·가정사 등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합헌 이유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판관 9명 중 4명(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법정의견에 반대했습니다. 반대의견은 개인의 명예보다는 표현의 자유 보장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주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표현의 자유는 우리 헌법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 기본권으로 최소한의 제한이 이뤄져야 한다. 둘째, 감시와 비판을 받아야 할 국가·공직자가 형사처벌의 주체가 되는 경우 국민의 감시와 비판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셋째, 명예훼손은 정정·반론보도·손해배상청구와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표현행위로 수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표현의 자유 위축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 설명했습니다. 동물병원에서 황당한 체험을 했다는 내용을 인터넷에 올린 사건(2012년 대법원 판결)과 성형 시술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포털 사이트 댓글로 단 사건(2009년 대법원 판결)입니다. 두 건은 검찰이 명예훼손죄로 기소했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각각 판결했습니다. 법무부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표현의 자유에 위축 효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헌재에 제시한 사례들이지만, 반대의견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검사가 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고, 원심법원도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고 명예훼손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이는 법률 전문가도 명예회손죄 유무죄를 가르는 ‘공공의 이익’ 판단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행법상 명예훼손죄가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이라는 구조라서 ‘합리적 인간’이라면 수사·재판 절차를 밟을 위험과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표현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게 반대의견의 생각입니다. 그 때문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존재하면 공익에 관한 진실마저 공적 토론의 장에서 사라질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반대의견도 사생활의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헌재가 “사생활의 비밀이 아닌 사실적시를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일부 위헌)을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거짓 사실과 사생활 비밀 폭로는 명예훼손죄로 인정하되, 그밖의 사실적시는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한 죄’는 오늘 살아남았지만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사단법인 ‘오픈넷’에서 청구한 헌법소원이 심리 중이라서 헌재의 결정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간통죄, 낙태죄가 그랬듯이 헌법재판관이 바뀌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지려면 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이 위헌 의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위헌으로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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