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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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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7체제에 정면도전하라

민주당의 조연에 머무르던 2기 진보운동에서 벗어나자본주의 위기에 대응하는 정의당만의 비전 밀고 나가야
등록 2022-06-29 09:36 수정 2022-06-29 22:00
2011년 12월11일 통합진보당 창당 대회 모습.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새진보통합연대)가 함께 창당했다. 이때부터 민주당을 경쟁이 아닌 협력 상대로 여기고 같이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을 구축해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됐다. 류우종 기자

2011년 12월11일 통합진보당 창당 대회 모습.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새진보통합연대)가 함께 창당했다. 이때부터 민주당을 경쟁이 아닌 협력 상대로 여기고 같이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을 구축해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됐다. 류우종 기자

정의당이 2022년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에서 참담한 결과와 마주했다. ‘민심의 심판’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결과였고, 그래서 지금 정의당은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정의당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싶다면, 우선 심판 내용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의당의 10여 년 역사를 넘어 한국 진보정당운동 전체를 시야에 담고 그 궤적을 되돌아봐야 한다.

6공화국 헌법 논의에서 배제된 민중의 세력화

현재 진보정당운동의 직접적 뿌리는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은 제6공화국 탄생 원년일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운동의 원점이기도 하다. 제6공화국 헌법은 기존 국회의 여야 간, 즉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전신들이 타협해 만들어졌다. 그해 여름 대투쟁으로 존재를 알린 노동자를 포함해 다양한 민중 집단은 이 과정에서 직접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장 그해 말 대선부터, 이렇게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결집하고 대변하려는 민중후보운동이 등장했다.

이것이 우리 시대 진보정당운동의 출발점이다. 제6공화국을 낳은 민주항쟁의 주역이었지만 제6공화국 정치 질서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 이들을 세력화해, 제6공화국의 설계자이자 관리자인 정치세력에 맞서는 것이 진보정치의 본령이었다. 이런 시도는 1987년 직후부터 줄기차게 계속됐지만, 1990년 ‘3당 합당’(여당인 민주정의당, 야당인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 이후 이미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양대 정당 중심 정치에 균열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1996~19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총파업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각성한 노동조합운동이 합류해, 2000년 민주노동당이 탄생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부터 부분적으로 도입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힘입어 꿈에도 그리던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민주노동당은 기존 양대 정당 모두를 ‘판갈이’ 대상으로 지목해, 양당 구도를 3당 구도로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양대 정당 중 한쪽이 급격히 무너지던 2007년 대선은 민주노동당이 이 목표를 향해 성큼 다가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제7공화국 건설’을 내세운 노회찬 등을 일찌감치 후보 선택지에서 제외한 민주노동당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진보정당운동의 첫 번째 호기를 놓친 결과, 대약진이 아니라 오히려 대분열이 시작됐다. 이때까지를 ‘진보정당운동 1기’라 부를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잠시 백가쟁명의 활력을 동반한 혼돈의 시기가 있었지만, 이는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정리됐다. 통합진보당 출범과 함께, 이후 10여 년을 지배할 진보정당운동의 주류 노선이 확정됐다. 양대 정당 중 한쪽(범민주당)은 이제 경쟁이 아닌 협력 상대가 됐으며, 이들과 함께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을 구축해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새 목표가 됐다. 여기에는, 민주진보 진영이 정권교체에 성공할 경우 협력 상대인 범민주당을 압박해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정치제도 개혁을 관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깔렸다.

2022년 6월12일 정의당 전국위원회에서 이은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했다. 2020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약진은커녕 현상 유지도 못했다. 진보정당운동의 2기가 막을 내리고 3기가 시작돼야 했지만, 정의당은 2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은 냉정한 심판을 받았다. 6월20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첫 회의에서 비대위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2년 6월12일 정의당 전국위원회에서 이은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했다. 2020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약진은커녕 현상 유지도 못했다. 진보정당운동의 2기가 막을 내리고 3기가 시작돼야 했지만, 정의당은 2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은 냉정한 심판을 받았다. 6월20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첫 회의에서 비대위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민주진보 진영’ 전략은 실패로 끝나

2016~2017년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는 결국 성사됐다. 그러나 어느덧 진보정당운동의 원내 대표자가 된 정의당을 기다린 것은 예기치 못한 처참한 실패였다. 선거법이 개정됐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게다가 양대 정당이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어 그나마 개혁 효과마저 무효로 만들어버렸다. 2020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약진은커녕 현상 유지도 제대로 못했다. 누가 봐도 한 시대의 종결이었다. 말하자면 ‘진보정당운동 2기’가 이렇게 막을 내렸다.

2기가 끝났으면, 3기가 시작돼야 했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는 정의당이 새로운 시기로 나아갈 만반의 준비를 했음을 보여주고 인정받아야 할 시험대였다. 정의당은 양당 독점 정치의 대립어로 ‘다당제 민주주의’를 외치며 이 시험에 임했다. 그러나 대중은 정의당이 새로운 시기에 부합하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는 냉정한 판정을 내렸다.

많이들 지적하는 것처럼, 정의당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란에서 양대 정당 중 한쪽을 거들어주는 행태를 반복했다. 2기 진보정당운동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의당이 부르짖는 ‘다당제 민주주의’는 결코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뒤집자는 호소로 다가올 수 없었다. 그저 자기 목표를 상실한 정당의 연명을 위한 하소연으로만 들렸다. 지방선거 결과는 바로 이에 대한 대중의 답이었다.

혹독한 판결을 받아든 정의당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선택이다. 진보정당운동 2기가 끝난 뒤에도 미루기만 하던 선택을 더는 외면할 수 없다. 정의당은 스스로 다음 같은 물음을 던지고 답해야 한다. 이미 몇 차례 결정적 기회를 놓쳤는데도 제6공화국 정치 질서에 계속 도전해야 하는가? 양대 정당과는 다른 정치적 구심을 형성하고 양당 독점 정치를 뒤흔들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혹시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은 아닌가? 그렇다면 제6공화국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지 않는가?

정의당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두 선택지

양당 대통령 후보 득표율이 95%를 훨씬 넘는 나라에서 양당 중심 정치를 바꾸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제6공화국 정치 질서를 한국 민주주의의 기본값으로 인정하고 이에 적응하는 길을 걷자고 할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처럼 국민의힘이 여당이 되고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 됐으니 다시 ‘민주진보 진영’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정의당은 이 진영 안에서 과거 열린민주당처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압력 정당으로 존속하며 진보정당운동 2기 시절 노선을 더욱 선명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추진할 수 있다. 이 경우 범민주당-진보정당 교차 투표층을 복원함으로써 2024년 총선에서 이번 지방선거 같은 참패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독자적 진보정당의 역사적 소명을 강조하며 완주하기로 했던 그 결정의 연장선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다. 검수완박 국면에서 보인 행태는 이런 궤도에서 벗어났던 일탈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제6공화국에 대한 도전자라는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원점으로 돌아와 이를 새 국면에 맞게 치열하게 다시 전개하기로 결의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정의당은 현재 같은 최악의 위기 국면에서도 여론조사에서 4% 수준을 유지하는 지지층에 더해, 거의 50%에 이르렀던 지방선거 기권층에서 새로운 지지자를 인입하며 토대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훨씬 강한 양대 정당 실망층을 결집해야 한다는 난해한 과제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이 현실 정치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솔직히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말할 뚜렷한 이유 또한 적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일각에서 기대하는 만큼 무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이 혼란한 대전환기가 요구하는 변화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경제위기, 주요 2개국(G2·미국과 중국) 패권 위기, 기후위기, 감염병 위기가 5년 동안 더욱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우리를 덮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실패가 곧 한국 사회 전체의 추락이 되지 않으려면, 이 정부 이후의 대안을 지금부터 빠른 속도로 준비해야 한다.

5년 뒤에는 문재인 정부 때와 다른 처방 내놔야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범민주당이 주연이 되고 진보정당이 조연이 돼 대안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결실이던 문재인 정부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정권교체 주기를 5년으로 단축할 만큼 참담한 실망감만 남았다. 그런데도 다시금 더불어민주당이 중심이 된 대안만이 윤석열 정부 이후의 선택지로 마련돼야 할까? 이번에는 제3의 대안 또한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5년 뒤 더욱 심각해질 자본주의 위기에 문재인 정부식 수수방관이나 미봉책과는 확연히 다른 처방을 제시할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정치적 구심과는 다른 구심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전망해도 이 구심이 5년 정도의 시간 안에 더불어민주당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준으로 급성장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는 ‘있어야’ 한다. 정의당은 현실 정치에서 맞부딪칠 어려움이 어느 정도일지와는 상관없이 이 과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떠안을 수도 있다.

선거 참패에 책임지고 대표단이 사퇴한 뒤, 정의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되도록 짧게 운영하고 서둘러 당직 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 위기 속에서 당을 다시 세우는 과제가 비대위가 아닌 차기 집행부 몫이 된 것이다. 그런 만큼 가을에 있을 대표 선거가 정의당의 운명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정의당이 더 나락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 선거에서 반드시 당의 정체성과 노선, 전략에 관한 투명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가 앞에 제시한 두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명확히 내걸고 당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만약 이에 대해서는 별말 없이 온갖 미사여구를 반복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 후보야말로 정의당을 더욱 구제불능 상태에 빠뜨리고 진보정당운동에 가장 허무한 종말을 안겨줄 자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선택지 가운데 후자, 즉 제6공화국에 대한 도전자로서 진보정당운동의 소명을 다시 제대로 추진하자는 후보들이 나선다면, 이런 충고를 전하고 싶다. 이 과업은 고상한 이론 논쟁을 거듭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당대회에서 획기적인 문서를 채택한다고 될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정의당의 존재 의의를 다시 평가받을 차기 총선까지는 실질적으로 1년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

이 짧은 기간에 정의당이 ‘진보정당운동 3기’라 할 만한 길을 제대로 밟고 있음을 인정받으려면 자신만의 비전과 의제, 실천 방식을 집약한 캠페인을 집중적으로 벌이는 수밖에 없다. 대표 후보들은 바로 이 캠페인 의제로 무엇을 선정할지 각자 뚜렷한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표로 당선된 뒤 자신이 내세운 의제를 중심으로 당 전체의 운명을 건 캠페인을 책임 있게 추진해야 한다.

정의당 대선 공약집에 답이 있다

이런 의제가 될 만한 대안은 이미 정의당 대선 공약집에 수두룩하게 있다. 기본소득보다 더 현실적이며 절실한 시민평생소득, 경제위기가 계속될수록 더 중요해질 일자리 보장제, 다양한 불안정 노동자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는 신노동법 등등. 정의당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자신이 준비한 이런 대안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세계경제가 흔들리고 한국의 양당 독점 정치는 무능을 노정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안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대중적 지지를 받는 쟁점으로 만들어내는 정당이라면, 분명 선거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부디, 앞으로 몇 달 동안 이 가능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 출발을 위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정의당이 되길 바란다.

장석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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