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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낸데’, 이승엽은 버릴 수 있을까

지도자 경력 없이 베어스 감독 되는 이승엽은 ‘베어 킹’으로 잘 안착할까
등록 2022-11-09 12:36 수정 2022-11-10 01:17
이승엽 두산 베어스 신임 감독이 2022년 10월24일 경기도 이천시 두산베어스파크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승엽 두산 베어스 신임 감독이 2022년 10월24일 경기도 이천시 두산베어스파크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라이언 킹’이 야구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파란 유니폼이 아니다. 몸속에도 ‘푸른 피’가 흐를 것 같던 그였다.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가 아닌 두산 베어스의 부름을 받았고 2017년 은퇴 뒤 5년 만에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계약기간은 3년(18억원)이지만 성적에 따라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 계약기간을 온전히 채우기 버거운 게 프로야구 감독이다.

방송 해설하다가 프로 사령탑이 되다

이승엽(46)의 컴백은 조금 특별나다. 프로, 아마추어 코치 경력 없이 방송 해설만 하다가 곧바로 프로 사령탑이 됐다. ‘국보급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선동열 전 삼성·기아 감독의 경우도 1년간 삼성 수석코치를 한 뒤 사령탑이 됐다. 선 전 감독은 2003시즌 뒤 두산과 감독 협상을 했지만 막판에 결렬돼 당시 김응용 감독이 있던 삼성으로 가서 수석코치를 했다. 선 전 감독이 이견 없이 두산과 감독 계약을 했다면 이승엽의 감독 직행도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도자 경력 없음’에 우려를 표하는 이도 많지만 미국과 일본에서는 코치 경험 없이 감독이 된 사례가 꽤 있었다. 애런 분(49) 뉴욕 양키스 감독도 2009년 은퇴 뒤 방송 해설위원 등을 하다가 2018년 빅리그 최고 명문 구단 사령탑으로 영입됐다. 그의 감독 성적은 5시즌 427승 281패(승률 0.603). 2022년에도 양키스를 챔피언십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2022시즌 시애틀 매리너스를 21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스콧 서비스(55) 감독 또한 코치 경력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구단 프런트(선수단 지원 사무조직) 경력은 풍부했다. 2001년 은퇴 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텍사스 레인저스의 선수 개발 책임자로 일했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는 엘에이(LA) 에인절스 부단장을 했다. 2016년부터 시애틀을 지휘한 그의 성적은 528승 504패(승률 0.512). 서비스 감독 외에 크레이그 카운셀 밀워키 브루어스 감독, 데이비드 로스 시카고 컵스 감독 등이 메이저리그 코치 경력 없이 곧바로 지휘봉을 잡았다.

일본 프로야구를 살펴보면 선수 겸 감독으로 뛴 사례까지 있었다. 레전드 포수였던 후루타 아쓰야는 와카마쓰 쓰토무 감독 사임 이후 2006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사령탑으로 임명됐는데 이때 선수로 1년, 감독으로 2년 계약을 했다. 그는 경기에 나서면서 팀도 지휘했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감독 부임 두 번째 해인 2007년, 팀은 21년 만에 리그 최하위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후 선수로서도, 지도자로서도 현장을 떠나게 됐다.

주니치 드래건스의 전성기를 이끈 오치아이 히로미쓰 전 감독 또한 감독 취임 전에는 현역 은퇴 뒤 방송 해설가 경험만 있었다. 하지만 주니치 감독 부임 첫해(2004년)에 팀을 일본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2007년에는 주니치에 53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겼다. 그해 아시아시리즈 우승컵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주니치 구단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해설가 경험만으로도 명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레전드 출신은 명장 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

한국 프로야구를 보면 장정석 현 기아(KIA) 타이거즈 단장이 코치 경력 없이 감독을 했다. 그는 은퇴 뒤 1군 매니저, 운영팀장 등을 거쳐 2016년 말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그는 첫해 포스트시즌에는 탈락했으나 이듬해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2019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22시즌 중반에 자진 사퇴한 허삼영 전 삼성 감독도 코치 경험은 전혀 없었다. 은퇴 뒤 삼성 전력분석팀에만 있었다. 팀·선수 분석에 탁월해서 ‘허파고’라는 별명이 있던 그는 데이터에 기반한 야구로 2021년 삼성을 정규리그 최고 승률 팀(0.563)으로 이끌었다. 타이브레이크(순위 결정전) 끝에 케이티(KT) 위즈에 패하면서 2위에 머물렀으나 무명 감독이 일으킨 일대 파란이었다.

장정석·허삼영 전 감독은 사령탑 선임 전 오랫동안 프런트에 근무하면서 구단 내부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선수단 파악이 쉬웠고, 소통 또한 나름 원활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다르다. 두산은 그에게 낯선 구단이다. 그는 일단 팀 내부 분위기에 적응하고 선수단과 낯가림도 없애야 한다. 코치, 프런트 출신보다 더 많은 숙제가 그 앞에 놓여 있다. ‘레전드 출신은 명장이 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도 깨부숴야 한다. 선동열, 김기태 등의 예외도 있지만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가 프로 지휘봉을 잡았다가 단시일에 내려놨다.

그나마 최근 한국 야구의 흐름이 ‘감독의 야구’가 아닌 ‘선수의 야구’로 흐른다는 점은 다행이다. 자유계약선수(FA) 제도 등의 영향으로 선수 몸값이 올라가면서 선수 스스로 성적을 내려는 욕심이 강하다. 굳이 감독이 선수를 채찍질할 필요가 없다. 2022년만 해도 감독의 야구를 하는 사령탑은 김태형 전 두산 감독 정도뿐이었다. 대부분은 선수 개개인의 역량에 맡기고 긴 정규리그를 버티는 경향이 짙었다. 그래서 감독들은 선수 부상 관리 등에 더 신경 쓰는 편이다.

‘초보 사령탑’ 이승엽 감독이 지도자 수업을 받기에 두산만 한 팀도 없을 듯하다. 두산은 노련한 프런트가 포진해 있고 시스템 야구도 잘 정착돼 있다. 2022년 성적이 9위로 미끄러진 터라 부임 첫해 성적 부담도 적은 편이다. 이승엽은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면서 차근차근 성적을 쌓아가면 된다. 구단 안팎에서 그를 흔들어대는 이들과 소문은 감내해야겠지만 말이다.

‘야구 감독’이라는 직함으로 똑같은 출발선에

베이브 루스는 이런 말을 했다. “어제의 홈런으로 오늘 승리할 수는 없다”라고. 레전드 출신 사령탑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의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코치 경력이 있든 없든 국내에 단 10명밖에 없는 ‘야구 감독’이라는 직함을 갖는 순간 똑같은 출발선에 서게 된다. 한때 레전드였다고 1승을 안고 시작하지 않는다.

이승엽은 현역 은퇴 1~2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예전 잘했던 기억으로 ‘내가 낸데(이승엽인데)’ 하고 플레이하면 분명히 기회가 와도 잘 살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잘했던 기억만으로 과거와 똑같이 하면 실패만 맞닥뜨리게 된다. 사령탑 자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낸데’라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유연한 사고로 그다운 야구를 정립해가는 ‘감독 이승엽’을 기대해본다. 혹시 아는가. 한때 ‘국민타자’가 제2의 ‘국민감독’이 될지.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야구가 뭐라고> 저자

*김양희의 인생 뭐야구: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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