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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기훈은 왜 우는가

신파가 ‘착즙’이 된 시대, 이호걸이 추적한 눈물의 동역학 <눈물과 정치>
등록 2021-12-08 14:17 수정 2021-12-09 02:12
이호걸 지음, 따비 펴냄

이호걸 지음, 따비 펴냄

“우리는 깐부잖아.” 넷플릭스 최대 화제작 <오징어 게임>에서 일남(오영수 분)은 기훈(이정재 분)의 손에 구슬을 쥐여주며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승리를 양보한 일남의 배려에 기훈은 오열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시청자도 오열한다.

기훈의 눈물은 <오징어 게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패배한 참가자들은 456억원이 걸린 또 한 번의 게임에서 서로 죽고 죽이며 부단히도 눈물을 흘린다. 비슷한 서바이벌 장르인 일본 영화 <신이 말하는 대로>나 <배틀로얄>이 참가자의 두뇌와 재치, 기지를 겨룬다면,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의 눈물을 겨룬다. 억지감동을 유발하는 ‘신파’라고 욕하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기훈을 따라 눈물을 흘린다.

이호걸의 <눈물과 정치>는 한국의 20세기가 이러한 눈물의 역사와 다름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비참한 역사여서라기보다는, 눈물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1926년 경성에서 개봉한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2017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비밀의 숲>에 이르기까지 지은이는 근 100년간의 영화, 소설, 드라마, 정치 팸플릿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눈물의 동역학’을 추적한다.

사람은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무언가 잘못됐을 때다. 눈에 뭐가 들어갔든, 억울한 일을 당했든,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든 간에 우리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냄으로써 몸과 마음의 이상을 물리적으로 배출한다. 육체적, 감정적 정화만이 눈물의 역할은 아니다. 수없이 울고 남들을 울리며 끝내 오징어 게임의 승리자가 된 기훈이 마지막에 자신은 말이 아니라며 시스템을 깨부수기 위한 전쟁을 선포했듯, 눈물은 새로운 행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돼주기도 한다.

눈물이 가진 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정치는 일찍부터 주목했다. 때로는 눈물을 이끌어내고, 때로는 눈물을 통제하고, 때로는 눈물을 기념함으로써 정치는 대중을 호명하고 또 동원할 수 있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에 맞선 민중운동 세력이 모두 눈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눈물의 귀재’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정치와 눈물의 결합은 한국에선 가족이라는 ‘매개’로 더욱 끈끈해졌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참가자들은 게임 바깥의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짓고, 게임 안에서는 눈물을 통해 일종의 ‘유사가족’을 이루지 않던가. 20세기 한국인은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정치적 실천을 요청하거나, 국가라는 거대한 가족을 위한 정치적 실천을 요청받았다. 사회학자 장경섭의 말마따나 ‘가족자유주의’라 부름 직한 이런 체제 안에, ‘개인’이나 ‘사회’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새로운 흐름’이란 뜻이 무색하게 한국 문화의 오랜 ‘고질병’으로 여겨졌던 신파는,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그 위상이 퇴락하는 듯하다. 정치인의 눈물은 위선적인 ‘착즙’으로 조롱받고, 어떻게든 눈물을 쥐어짜려는 영화나 드라마는 ‘최루물’로 매도된다. 2010년 김연아의 금메달과 달리, 2021년 안산의 금메달은 눈물보다 웃음과 여유로 기억된다.

재밌는 건 눈물이 말라가는 한국과 달리 국외에선 오히려 눈물이 펑펑 터진다는 점이다. 2016년 영화 <부산행>의 아시아 흥행을 시작으로 조금씩 세를 넓혀가던 한국의 신파는, 2021년 <오징어 게임>으로 마침내 ‘포텐’을 터뜨렸다. 눈물, 정치, 가족이 긴밀히 얽힌 한국 신파물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자못 궁금해진다. 그들은 왜 눈물을 필요로 하는 걸까.

유찬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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