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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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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리본을 동여맨 ‘여자 여자 여자’

[댓걸 중독기] 여성 레이블링의 계보, 그중 ‘댓걸’은 패키지 상품
등록 2021-09-29 14:16 수정 2021-09-30 01:07
댓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소희. 유튜브 화면 갈무리

댓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소희. 유튜브 화면 갈무리

“이거 그냥 ‘미라클 모닝’(이른 아침에 일어나 독서·운동 등 자기계발을 하는 것) 포장지만 바꾼 거 아냐?”

‘댓걸’(that girl) 영상이 해외 틱톡, 유튜브에서 핫하다. 댓걸이란, 평소 바라던 ‘바로 그 여자’라는 뜻이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댓걸의 일과는 이렇다. ①아침 5~6시에 일어난다 ②커튼을 걷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③예쁜 컵에 물을 마시며 수분을 보충한다 ④필라테스 등 아침운동을 한다 ⑤뷰티 루틴(팩 하기, 로션 바르기, 메이크업 등)을 진행한다 ⑥하루 계획을 세운다 ⑦감사 목록을 적는다 ⑧예쁘게 차린 샐러드와 프로틴셰이크로 아침 식사를 한다. 저녁 일과도 있지만 주로 아침 일과가 중심이다. 당연히 ‘배민맛’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누군가 댓걸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훈녀생정’(훈녀가 되기 위한 생활정보)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레이블링된 여성상의 계보가 줄줄이 사탕처럼 기억났다. 프로아나(Pro-ana·거식증 치료를 거부하고 마른 몸을 추구하는 사람), 여자력(남성에게 매력적인 여성스러움의 정도, 일본의 유행어), 알파걸(남성의 능력에 뒤지지 않는 여성), 골드미스(학력과 재력을 갖춘 30~40대 여성), 개강여신(방학 동안 몰라보게 예뻐진 여대생),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현모양처까지. ‘핑크색’ 리본으로 동여맨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니까 댓보이(that boy), 훈남생정, 남자력, 골드미스터, 개강남신, 현부양부는 없다.

신세경의 유튜브 영상. 유튜브 화면 갈무리

신세경의 유튜브 영상. 유튜브 화면 갈무리

우리나라에서 댓걸은 아직 생소하지만, 내용만 보면 이효리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는 제주도에서 남편과 함께 민박을 차리고 반려동물 ‘순심이’를 키우며 텃밭을 가꿨다. 댓걸은 다른 여성 레이블링과 다르게 ‘패키지 상품’이다. 외모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까지 완벽하고 특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연예인 신세경·안소희가 대표적인 댓걸 같은데 이들이 유튜브에서 운동 루틴(습관), 직접 만든 디저트, 새로운 식재료로 요리해 예쁘게 플레이팅한 음식이 ‘팔로함직한’ 것으로 유행해서다. 핵심은 그냥 운동, 예쁜 음식이 아니라 운동 ‘루틴’, 요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셀럽들의 루틴이란 것을 대부분 내 친구들은 이미 비슷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하루 일과에 충실하고, 여러 취미를 시도하고,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고 있었다. 웃긴 건 내 주변에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따지고 보니 그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힙한 이미지로 올리지 않았다. 바로 곁에서 보고도 배울 만한 라이프스타일로 생각지 못했다니! 베드로가 예수님 손바닥의 구멍을 직접 만져봐야 했다면, 나는 내 손에 쥔 스마트폰 속 인스타그램 셀럽들의 피드를 직접 눌러봐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한 친구는 “도우리한테 뭐 알려주려면 인스타그램에 올려”라고 놀리기도 했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레이블링된 여성이 꾸준히 인기 있나보다. 그런 여성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미지 허기’에 덜 시달리고 싶다. 댓걸 말고 ‘여기 언니’들 만나야지. 친구이자 언니인 혠, 또 동생이지만 멋있으면 다 언니니까 쥰까지 다시 봐야지.

도우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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