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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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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문이라고 밀고 나간 분옥이

겨울에는 엿을 고아서 팔고 여름에는 나물이며 집에 없는 건 사서라도 팔고
등록 2021-06-20 08:17 수정 2021-06-25 01:47
구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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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생 시절 분옥이는 결석 대장인 나보다 더 결석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언나(아기) 보느라고 날씨 좋은 날은 결석하고 비 오는 날만 학교에 갔습니다. 분옥이는 날씨 좋은 날은 나물을 뜯고 장날이면 나물을 팔러 가느라고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비 오는 날은 왠지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가면 청승스러워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분옥이는 아주 이른 봄부터 나물을 뜯어 나릅니다. 나물이라고 겨우 양지 쪽에서 꽃다지나 조팝나물, 콩나물(이른 봄 밭에서 나는 콩나물처럼 생긴 나물) 같은 흙내 나는 밭풀부터 열심히 뜯어다 팝니다. 눈도 녹기 전 양지 쪽 아주 특별히 아늑하고 따뜻한 곳에 일찍 돋아나는 나물이 있습니다. 분옥이는 뇌운리 본말부터 어두니골 앞강까지 어느 곳에 일찍 돋아나는 나물이 있는지 다 압니다. 높은 벼랑 위에 일찍 돋아나는 며느리취(금낭화) 한 포기도 놓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뜯습니다. 어느 바위 밑 일찍 돋아나는 나물 한 포기, 돌담 속에 돋아나는 원추리 한 포기도 놓치지 않고 뜯으러 다닙니다. 분옥이는 즈네(자기네) 동네에서 아시네(지명) 밭으로 강변 따라 어두니골 앞강까지 와서 나물을 뜯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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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진귀한 물건인 듯이 파는 분옥이

나흘 동안 열심히 뜯어 모은 나물은 장날이면 삶아서 조그만 함지박에 이고 팔러 갑니다. 분옥이는 키도 보통 아이들보다 작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지 혼자서 장을 향해 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팔러 가는 아나, 팔러 보내는 에미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분옥이 어머니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물은 아가 뜯어오더라도 파는 것은 에미가 하지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분옥이 어머니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아가 촌구석에서 뭘 보고 자라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장날마다 나물을 팔러 다니면 아가 보고 배우는 것이 많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아가 약으라고 장날 나물 팔러 보낸답니다. 분옥이 어머니는 시집오기 전에 시장 한 번 가본 일이 없었답니다. 지금도 장을 다니기는 하지만 주변머리가 없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 배움에는 취미가 없던 분옥이는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다시는 학교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장날이면 나물 팔러 가는 분옥이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훗날 밥술이나 먹고 양반이라 자부하고 사는 어느 집 맏며느리로 일찍 시집갔습니다.

내가 결혼한 뒤 평창으로 이사 와서 사고파는 것을 할 줄 몰라 쩔쩔매고 살 때였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얼갈이무를 파는 분옥이를 만났습니다. 분옥이는 세상에 없는 진귀한 물건을 파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네는 비료도 많이 주지 않고 순 퇴비로 키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먹으면 맛있는지 먹는 방법도 이야기합니다. 청산유수라고 하더니 분옥이는 더듬지도 않고 잘도 말합니다. 나물을 팔러 다니던 어린 분옥이는 아주 능숙한 장사꾼이 돼 있었습니다.

평창 시장에서 분옥이의 엿은 유명합니다. 옥수수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서 겨울이면 집집이 엿을 고아다 팝니다. 분옥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양의 엿을 가지고 옵니다. 엿을 깰 수 있는 작은 끌 같은 도구도 가지고 다닙니다. 시장 바닥에 자리를 잡으면 우선 맛보기 엿부터 준비합니다. 아낌없이 엿 한 반대기를 작은 끌로 툭툭 쳐서 깨서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엿을 드시라고 권합니다. 맛보기 엿이라고 작은 조각이 아니라 입에 집어넣으면 제법 볼이 불어날 정도로 후하게 조각을 냈습니다. 사람들은 엿을 우물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엿을 살 거면 분옥이의 엿을 사갑니다. 분옥이는 자기 엿은 면경(손거울)알 같다고 얼굴을 비춰보라고 사람들을 불러모읍니다. 어떻든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자기 물건이 최고라고 잠시도 입이 쉬는 법이 없습니다. 수단 좋은 분옥이는 단골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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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털 빼서 제 구멍에 박는 시댁 어른들

장을 담글 철이 되면 조청도 분옥이한테 맞추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친정에서 장을 담글 때면 조청을 얻는데 좀 분량이 적어서 분옥이한테 조금만 더 사기로 했습니다. 분옥이는 장날도 아니고 무싯날(장이 서지 않는 날)인데 이른 아침 조청 배달을 왔습니다. 장날 갖다주면 되지 바쁜데 왔냐고 했습니다. 분옥이는 오늘 조청을 갖다달라는 집이 여럿 있어서 왔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고 가라고 붙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분옥이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집은 논이 아주 많은 부자라고 소문이 났답니다. 자기는 논이 없는 산골짝에서 강냉이밥 먹는 게 싫어서 시집가면 쌀밥만 먹겠다고 내심 좋았답니다. 막상 시집와서 보니 논 몇 마지기에 산비탈 밭이 전부여서 간당간당하게 겨우 밥 먹고 사는 집이었답니다. 촌부자는 일부자지 좀 산다 하는 집도 넉넉한 살림은 다들 아니었습니다. 분옥이 신랑도 초등학교를 나오고 한문을 좀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시할아버지에 시동생이 둘, 시누이가 둘이었습니다. 가족이 시아버지나 신랑이나 다들 순하기만 해서 제 털 빼서 제 구멍에 박는 답답한 사람이었답니다. 시어머니는 시장도 안 가고 집안에만 곱게 계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난감해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수단은 없었지만 살림은 야무지게 하는 분이셔서 독하게 일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때는 혼자 두부도 만들고 엿도 고면서 어머니가 많이 야속스러웠다고 합니다. 초가을에 시집와서 그해 겨울에 엿장사로 나섰답니다. 양반이고 한학자인 시할아버지는 어린것이 집안 망신시킨다고 노발대발하셨답니다. 하루이틀 생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벽을 문이라고 여기며 밀고 나가기로 했답니다. 겨울에는 엿을 고아서 팔고 여름에는 나물이며 집에 없는 건 사서라도 팔았답니다. 식구들이 놀지 못하게 없는 소도 얻어다 키우고 배냇돼지(주인과 나눠 갖기로 하고 기르는 돼지)도 얻어다 키우면서 억척을 떨었답니다. 그렇게 억척 떨고 살았더니 시누 시동생을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할 수 있었습니다. 살림하면서 짜고 짜고 모아 땅도 늘렸답니다.

“팔자 좋은 너는 고생이 무엇인지 모를 거여”

“팔자 좋은 너는 고생이 무엇인지 모를 거여” 합니다. 나같이 고생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보면 나는 입도 못 벌릴 정도로 고생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감히 내 처지를 불평할 수 없게 됐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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