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

부자든 가난하든 음식에 넣어 먹고 아플 때 약도 되는 ‘미나리’…
국적 넘어 보편적 감동 줘
등록 2021-02-26 23:33 수정 2021-02-26 23:54
판시네마 제공

판시네마 제공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 건데….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하든. 김치에 넣어 먹고 찌개에 넣어 먹고. 아플 때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순자)

메시지와 상관없는 영화 제목도 있지만, 영화 <미나리>는 제목이 메시지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특히 순자(윤여정)의 대사 속에 담긴 ‘원더풀 미나리’는 관객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응축한 한마디다. 낯선 땅에서도 뿌리내린 미나리처럼 단단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 <미나리>는 뻔한 듯 뻔하지 않다. 큰 갈등도 반전도 없이 잔잔하지만 그 흐름 속에 묘한 울림이 있다.

“한 번은 성공하는 아버지 모습 보여주고파”

“10년 동안 병아리 똥구멍만 봤어!”(제이컵) 1980년대, 제이컵(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캘리포니아에 첫발을 딛는다. 제이컵은 10년간 병아리가 수놈인지 암놈인지 감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아들 데이비드(앨런 김)도 낳았지만 번듯하게 자리 잡진 못했다. 제이컵은 새로운 꿈을 꾸며 아칸소로 떠난다. 한국 사람은커녕 인적도 드문 곳에 놓인 이동식 주택이 이들의 집이다. 제이컵은 한국 농작물을 기르면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한인들의 수요가 있을 거라 확신하고 농사를 시작한다. 모니카는 심장이 아픈 데이비드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병원에 갈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한 번은 성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남편의 고집을 꺾진 못한다. 부부가 농장과 병아리 감별사 일을 병행하느라 아이들을 돌보기 힘들어지자, 한국에 있는 모니카의 엄마이자 아이들의 할머니 순자가 미국으로 건너온다.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아요.”(데이비드) “할머니 같은 게 뭔데?”(순자) 난생처음 할머니를 본 아이들에게 순자는 할머니 같지 않다. 쿠키를 구울 줄도 모르고, 화투를 가르치며, 쓰기만 한 보약을 먹으라 하고, 한국식 욕을 한다. 데이비드는 “할머니에게서 한국 냄새가 나고 코를 골아 싫다”고 떼를 쓴다.

그러나 순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오줌을 싼 데이비드를 놀리면서도 몸이 약한 데이비드를 “스트롱 뽀이”라고 치켜세워주기도 하고, 아이들의 부모가 위험하다고 가지 못하게 한 숲속에 데려가 미나리를 심기도 한다. 미나리를 심으러 갔다가 뱀을 만나는 장면은 인상 깊다. 데이비드가 뱀을 쫓아내려 하자 순자는 “위험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좋으니 내버려두라”고 한다. 순자의 이 말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자주 다투는 딸 부부에게 하는 말로도 들린다. 문제는 숨기지 않고 털어놓을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이민자 가족 설정이지만 공감대 넓어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만든 영화다. 어린 시절 정 감독의 아버지가 제이컵처럼 가족을 모두 데리고 아칸소로 갔다고 한다. 정 감독은 예일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던 중 영화에 빠져 전공을 바꿨다. 그의 첫 장편영화 <문유랑가보>는 제60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43살 감독은 딸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미나리>를 기획했다. 다만 미국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가 쓴 한국어 대본은 문어체에 가까웠다. 이를 생생하게 다듬어준 것은 배우들이다. 감독과 배우들은 촬영을 마치면 함께 숙소에 모여 밥을 해 먹고 다음날 촬영분의 대사를 수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민 가족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들이 겪는 차별이나 문화적 차이, 이민자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가족에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와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싶은 어머니의 분투가 영화의 뼈대다. 이 때문에 1980년대라는 시대 설정, 이민이라는 상황과 상관없이 공감대가 넓은 듯하다.

한국에서 순자가 싸들고 온 고춧가루를 맛보며 좋아하고, 그동안 모아온 돈을 순자가 건네자 모니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고향에 계신 나의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또 자주 다투는 부모님과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의젓한 장녀 역할을 하는 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 모습이 생각났다. 당시 나 역시 어린이였음에도 장녀란 이유로 어른스러운 척 동생들을 돌봤던 기억, 나의 상경 후 엄마가 손에 다 들지도 못할 정도로 반찬을 많이 만들어 서울에 오던 모습이 상기됐다.

농사에 필요한 수도 설치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직접 우물을 찾아내면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해” 하고 좋아하다가도, 결국 물이 모자라 농사를 망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이컵을 보면 인생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제이컵이 진심을 다해 심은 채소보다 순자가 아무 데나 심어놓은 미나리가 더 잘 자랐듯 말 이다.

<미나리>는 2020년 세상에 공개된 이후 전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며 총 74관왕(2021년 2월24일 기준)을 기록 중이다. 특히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26개 받았다. 93회 아카데미 시상식(4월25일 개최 예정)에서는 음악상과 주제가상 부문 예비후보에 올랐다.

미국 영화냐 외국어 영화냐 논란을 넘어

<미나리>는 미국인인 브래드 핏이 설립한 제작사 ‘플랜비(B)’에서 제작을 맡았고, 미국 국적 감독이 만든 영화임에도 ‘외국어 영화’ 논란이 일었다. 한국어 대사가 절반이 넘는다는 이유로 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현지시각 2월28일 개최)을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2월3일 ‘자국 영화’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려 최우수작품상 수상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나리>가 미국 영화이든 한국 영화이든 중요하지 않다. 이미 국적을 넘어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세계인의 영화다. 어떤 음식에 넣어도 맛있고, 약으로도 먹을 수 있는 미나리가 제철을 맞아 한국에도 울림을 주러 온다. 3월3일 개봉. 115분.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