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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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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열전’에서 배운다

등록 2001-09-19 15:00 수정 2020-05-02 19:22

자신을 죽이려 했던 예양의 의리에 눈물을 흘린 조양자의 태도를 미국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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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맞을 때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란 우려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다행히 밀레니엄 버그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새 천년은 조용히 시작되는 듯싶었다. 적어도 9월11일까지는. 할리우드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전대미문의 테러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야만의 20세기에 이어 우리의 21세기는 이렇게 충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내가 조심해서 그를 피하면 된다”

역사이야기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한 개인의 삶이나 역사적 사건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안중근이 의사인가 테러리스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비단 안중근 의사뿐이겠는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란 하나의 중요한 갈래였으며, 총과 폭탄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숱한 의사가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추앙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테러리즘이라는 것에 대한 평가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역사학의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 속의 수많은 인간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사마천이 가장 짠한 마음을 갖고 썼음직한 부분이 바로 오늘날의 암살자나 테러리스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의리와 죽음의 이야기인 <자객열전>이다.

진(晉) 나라에 예양(豫讓)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 밑에 있다가 지백(智伯)을 섬기면서 중용되었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쳤다가 패하여 그 후손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예양은 자신을 알아준 지백을 위해 복수를 결심하고 궁중에 접근하기 위해 죄수로 가장하고 궁중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하며 틈을 보았다. 조양자가 변소에 갔다가 느낌이 이상하여 심문하여보니 예양의 품에서 비수가 나왔다. 주위에서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조양자는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해서 그를 피하면 된다. 지백이 죽고 그의 후손도 없는데도 그 신하로서 원수를 갚으려 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어진 사람이다”라며 풀어주었다.

예양은 이번에는 몸에 옻칠을 한 채 나병 환자로 가장하고 숯을 먹고 반벙어리가 되어 시장에서 걸식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예양은 조양자가 지나는 길목의 다리 밑에 숨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조양자의 말이 무엇엔가 놀라자 조양자가 “또 예양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시켜 잡아 심문하니 과연 예양이었다. 조양자는 그대가 전에 섬기던 사람들을 모두 지백이 멸했는데, 그때는 오히려 지백의 신하가 되었는데, 왜 지백을 위해 나에게만 유독 집요하게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양은 그 전에 섬긴 이들은 자신을 여느 사람과 같이 대했기 때문에 자신도 여느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보답했지만, 지백은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접했기 때문에 자신도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양자가 울면서 이제 당신을 더는 풀어줄 수 없다고 하자, 예양은 자신이 사형을 달게 받겠지만, 조양자의 의복이라도 주면 그것을 베어 원수를 갚는 뜻을 이루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양자가 이를 의롭게 여겨 사람을 시켜 자신의 의복을 가져다주자 예양은 이를 세번 뛰어오르며 칼로 내리치고는 마침내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숯을 먹어 몸을 혹사한 예양도 예양이지만, 집요하게 자신을 죽이려던 암살자의 의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조양자 역시 보통인물은 아니었다.

사마천은 왜 자객들을 높게 평가했는가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나 위(衛)나라 사람으로 형가(荊軻)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연(燕)나라로 가서 살았는데 그때 진(秦)나라가 크게 세력을 떨치며 연을 위협했다. 연의 태자 단(丹)이 형가에게 뒤에 진시황이 되는 진나라 왕을 암살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진나라 장군 번어기(樊於期)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와 있었는데, 형가는 진왕에게 접근하려면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의 옥토인 독항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자 단은 번어기는 망명하여 연나라에 몸을 맡긴 사람인데 어찌 그의 목을 벨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형가는 번어기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번어기는 진왕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가는 번어기의 목을 상자에 넣고 독을 묻힌 예리한 비수를 지도에 말아 감추고는 길을 떠났다. 태자 단과 형가의 친구 고점리 등 몇몇 사람이 상복을 입고 형가를 전송하러 역수(易水)까지 나왔다. 고점리가 켜는 악기에 맞추어 형가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역수의 물이 차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그리고는 수레를 타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진왕은 번어기의 목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고는 지도를 보고자 했다. 두루마리 지도를 펴서 비수가 나오자 형가는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오른손에 비수를 쥐고 진왕을 찔렀으나 몸에 닿지 않았다. 진왕이 몸을 빼어 달아나자 형가는 뒤를 쫓고 진왕은 기둥을 뱅뱅 돌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신하들이 맨손으로 달려드어 형가를 쳤고, 손이 떨려 긴 칼을 뽑지 못하던 진왕은 그제서야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마지막으로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으나 그마저 빗나갔다. 형가의 사건으로 대로한 진왕은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마침내 연을 멸망시켰다. 사마천은 형가를 비롯한 자객들은 혹을 뜻을 이루기도 하고 혹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뜻을 분명히 세웠고 그 의지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이니 그들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느냐고 평했다.

사마천이 자객들에 대해 매우 동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암살이라는 그들의 행위를 약자들의 무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결과나 수단보다는 목적과 동기를 중시했던 고대인의 사유방식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뜻을 이루려 했던 자객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즉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고 나름대로 테러를 당할 만한 이유가 있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에, 사마천도 약자들의 무기로서의 테러에 대해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에서도 테러의 대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테러를 독립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대표적인 단체로는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은 ‘칠가살’(七可殺)이라 하여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으로 암살대상을 명확히 했다. 반면 임시정부가 정한 ‘칠가살’에는 ‘적의 관리된 자, 애국 의연금 횡령자 등 불량배, 모반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의열단의 규정에 비해 훨씬 포괄적이었다.

사회주의의 발전, 테러활동의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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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행위가 각광을 받던 시기의 분위기는 단재 신채호의 명문인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단재는 “양병 십만이 일척(一擲)의 작탄만 못하며 억천장 신문·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지니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하여 부절하는 폭력-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마지막 조선의용대원으로 유명한 김학철은 20년대와 30년대에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혁명자들의 대부분은 테러 분자였다면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으로 테러 활동을 숭상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수 용사들의 모험적인 행동으로 능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통치를 뒤엎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망국의 치욕을 자기들의 피로써 능히 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여 그들은 적의 요인을 암살하고 특무와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을 자기들의 주요한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서구나 일본에서 좌익들도 테러를 투쟁수단으로 채택했지만, 1920년대 전반기를 풍미했던 테러활동이 독립운동에서의 주요 수단의 위치를 내준 데에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 크게 작용했다. 의열단 내에서도 테러활동이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고, 희생에 비해 성과가 크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단원들 내에서도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한 것이다. <아리랑>의 김산은 의열단이 분열하게 된 이유를 한국 자체의 대중운동이 상당한 수준까지 솟구쳐오르고 대중운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진 데서 찾았다. 정치활동을 가능케 하는 대중운동의 발전으로 개인적인 테러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새로이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산은 1924년까지 의열단원으로서 일제에 희생된 사람이 300명 가까웠으며, 별로 성과도 없이 희생만 늘어나자 단원들의 사기도 저하되었다고 회고했다. 남아 있는 의열단원의 태반은 공산주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또 그 대부분은 1927년의 광동봉기에 목숨을 바쳤다.

“안중근식이 옳은가, 이준식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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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노선에 가장 치열한 비판을 가한 집단은 의열단에서 이탈한 윤자영 등이 조직한 상해청년동맹이었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은 “파괴의 목적물이 개인 또는 건물에 있지 않고, 정치상·경제상 기타 각 방면의 현상 제도·조직, 그 이민족의 통치권을 파괴하는 데 있다”면서 “개인의 암살과 건물의 파괴는 이를 계속 보편화할 때 사회를 암흑된 상태로 빠뜨린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들도 폭력의 사용을 배척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공포론’ 즉 테러활동론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은 “폭력 부인의 소극적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공포주의 만능론을 배척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의열단은 1927년 5월에 발표한 선언문을 통해 암살파괴운동을 종결짓고 무장군사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 개인적 테러가 아닌 조직된 군중에 의한 무장투쟁의 시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뒷날 무장유격대를 이끈 김일성도 자신의 소년 시절이었던 1920년대 후반 중국 지린에 있을 때 조선청년들 속에서 이준 열사식의 외교론적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식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늘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회고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중학교 선생님이던 중국인 공산주의자 샹유에(尙越)에게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안중근의 행동은 물론 애국적이지만, 투쟁방법은 모험주의적이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은 “결코 군벌의 앞잡이 한두명을 처단하는 테러적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인민대중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전 인민을 궐기시킬 때에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우리의 독립운동, 아니 전세계의 민족해방운동 내부에서 테러에 대한 논쟁은 서구언론에서처럼 테러라는 행위 자체가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것이라는 점을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논쟁의 초점은 테러라는 방법을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여부였다.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황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같은 해 4월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침략군 수뇌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오죽했으면 히로히토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겠다고 나선 청년 이봉창에게 생활비도 쥐어주지 못해 그가 노동을 해서 생계를 꾸리며 그 돈으로 백범 등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야 했을까? 젊은 나이에 이미 인생의 여러 가지 쾌락을 맛보았으니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겠다고 나선 이봉창을 사지로 떠나보내며 백범은 작별의 사진을 같이 찍었다. 이때 백범의 안색이 처참함을 보고 이봉창은 “우리는 대사를 성취할 터인데 기쁜 낯으로 박읍시다”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그때 이봉창 의사는 2천여년 전 형가가 역수를 건널 때 남긴 노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은 히로히토가 탄 마차가 아니라 다른 마차를 맞히는 바람에 히로히토는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중국의 일부 신문은 이를 ‘불행부중’(不幸不中) 즉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고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석달 뒤 윤봉길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白川) 대장과 일본거류민단장을 폭살시키고, 뒤에 관동군 사령관을 지낸 우에다(植田) 등 일제의 군관 요인 다수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두 사건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쪽의 태도는 현격히 달라져 침체와 극심한 재정적 곤궁상태에 놓여 있던 임시정부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의열단과 비행기 테러

김산은 상하이 시절의 의열단원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고 자기네들의 특별한 임무에 알맞은 심리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아주 깨끗이 차려입었다. 그들은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하였으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 멋진 젊은이들과 테러집단의 무기 역시 대량살상력을 가지게 된 요즈음의 테러리스트들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최근의 테러는 꼭 적의 수뇌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저마다 자기네가 주도한 의거라고 나섰던 것과는 달리 이번 항공기 테러의 경우 아무도 “우리가 했소”라고 나서지 않는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증오와 원한의 피눈물이 짙게 배어나는 이 테러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의열투쟁이라 불렀던 테러는 언제 어떤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한번도 본토를 공격당한 적이 없는 미국한테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예양의 의리에 눈물을 흘린 조양자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도 당할 수 있다라는 자각이 미운 놈과 더불어 사는 지혜와 관용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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