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흰 빵의 맛은 대체 무엇이더냐

에쿠니 가오리의 <부드러운 양상추>
등록 2012-02-25 05:16 수정 2020-05-02 19:26
'브레드 랩'의 빵. 여의도 소재.

'브레드 랩'의 빵. 여의도 소재.

어릴 적, 저녁 6~7시까지 TV는 나와 내 동생 차지였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우리는 만화를 시청했다. 주로 일본에서 수입된 만화들이었는데,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 에서 네로와 파트라슈가 죽었을 때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리가 즐겨본 만화로는 등이 있는데, 그림체가 다들 비슷했던 게 크고서 알아보니 지브리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든 만화들이었다.

부드러운 색감의 그림과 따뜻한 이야기는 막 감성이 자라기 시작한 여자아이 둘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놨다. 우리는 잠자리에 누워서 그날의 만화를 리뷰하고(동생은 심지어 몇십 분짜리 만화의 대사를 통째 외우기도 했다), 그 잔상으로 꿈까지 꿔가며 흠뻑 빠져 지냈다. 우리는 종종 만화를 복기하다 이들 만화 시리즈에 나오는 빵을 화두에 올리기도 했다. 네로건 하이디건 앤이건 모두들 식사 시간만 되면 커다란 나무 바구니에서 둥그런 빵을 꺼내 베어먹는데, 단팥빵이며 크림빵과는 다른 이국적인 모양이었다. 하이디는 제 얼굴만 한 빵을 들고 야무지게 떼어먹곤 했다. “언니야, 하이디 빵 궁금하다. 맞제?”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도 하이디의 빵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최근 펴낸 산문집 (소담출판사 펴냄)에는 요하나 슈피리의 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며 이런 말을 썼다. “하이디가 평소에 먹는 검은 빵은 검은 빵이 아니라 그냥 ‘빵’이라고 표기되고, 그 ‘빵’보다 부드러운 빵만 ‘흰 빵’으로 표기된다. 더구나 간혹 테이블에 등장하는 ‘흰 빵’을 하이디가 먹는 장면은 한 번도 없어서(걱정스러울 정도로 마음씨가 고운 하이디는 아는 할머니에게 드리려고 흰 빵이 나오면 먹지 않고 간직한다), 독자로서는 어떤 맛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편 보통 빵은 적극적으로 묘사되는데, 치즈나 말린 고기와 함께 먹는 그 빵이 아주 맛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더 각별하다는 흰 빵의 맛은 어떨지 호기심이 인다.”

얼마 전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다들 지브리스튜디오의 만화 속 빵 맛에 궁금증이 인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왠지 호빵 같은 식감일 듯하다고 말했고, 식빵 맛, 쿠키처럼 달콤한 맛일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이디의 흰 빵은 1990년대에 만화를 애청했던 이들에게 집단기억으로 남았는지, 포털 사이트에 ‘하이디 빵’이라고 치면 모양이 제각각인 흰 빵 사진이 줄줄이 뜬다. 특별한 이름은 없다. 아마도 우리가 흰쌀밥이랑 현미밥을 지어 먹듯, 색이 짙은 호밀빵과 구분해 흰 빵이라 부르나 싶다. 포동포동한 흰 빵 사진을 하염없이 보노라니 군침이 돌았다. 왠지 레시피도 간단해 보인다. 어느새, ‘흰 빵의 각별한 맛’에 호기심이 인다는 에쿠니 가오리의 호기심을 대신 해결해줄 요량이 샘솟는다.

베이킹만은 집에서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건만…. (시간은 오래 걸리고, 손이 커 나도 모르게 자꾸 대량생산을 하게 되는데 먹을 사람은 없고 설거지는 산처럼 쌓인다. 꼼꼼하지 못한 탓에 꼭 한 번 밀가루를 식탁에 쏟고 대충대충 계량해 결국 맛도 식감도 엉망이 되어 냉장고에서 며칠 묻혀 있다가 쓰레기통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므로.) 어쨌거나 나로서는 길고도 지난한 베이킹에 다시 충동적으로 도전을 했는데, 결과는 뭐…. 포동포동 흰 빵의 맛은 대체 무엇이더냐, 하이디.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