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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

혁명의 별을 새긴 강철 관에 잠들다

고려인 사회주의 혁명가 채그리고리의 첫 고국 방문, 경찰에 발각됐으나 비밀결사와 동료는 지켜내

제1352호
2021.03.03
등록 : 2021-03-03 00:23 수정 : 2021-03-03 09:58
채그리고리의 주검을 세브란스병원에 항구적으로 보존할 목적으로 제작한 철제관. 비밀결사 동료 7명이 둘러싸고 있다. 임경석 제공

국경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 단둥시)에서 평북 신의주로 입국하는 길은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위험했다. 비밀활동을 하는 혁명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조밀한 감시망이 겹겹이 깔려 있었다. 신의주경찰서는 ‘중범자’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손을 꼽는 관서였다. 1928년 한 해 검거한 ‘범죄’ 총수는 3109건이고 그중 중범에 해당하는 건 711건이다. 정치·사상범 사건은 131건에 이르렀다.1 한 달에 평균 10건이 넘었다. 국경을 넘으려던 독립군과 사회주의자가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발각됐는지 보여준다.

1928년 1월11일, 채그리고리는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37살의 러시아 태생 조선인, 즉 고려인이었다. 본명은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채였고, 조선식 이름은 채성룡(蔡成龍)이었다. 국내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박준호라는 가명을 쓸 예정이었다. 2주 전에 중국 베이징을 떠나, 여러 준비를 마치고 입국을 결행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입국하기로 약속한 동료는 세 사람이었다. 다만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따로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졸인 가슴 내려놓은 그 순간
국경을 통과하는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하면 경찰관, 헌병, 세무관리 세 종류 관헌들이 객차마다 올라탔다. 소설가 심훈은 그 양상을, “국경을 지키는 정사복 경관, 육혈포를 걸어멘 헌병이며, 세관의 관리들은 커다란 벌레를 뜯어먹으려고 달려드는 주린 개미 떼처럼 플랫폼에 지쳐 늘어진 객차의 마디마디로 다투어 기어올랐다”2고 썼다. 승객들은 시렁에 올려놓았던 짐짝과 가방을 검사받기 쉽게끔 내려놓고, 속을 열어 보여야 했다.

채그리고리는 안동역과 신의주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기차는 경성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졸이던 가슴을 막 진정하던 차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신의주 다음 정거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대였다. 아마 남시역이거나 차련관역이었을 것이다. 의심받을 만한 빌미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사람인데도 조선말이 서툴다거나, 입국 목적을 자연스럽게 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는 국경의 경계망을 통과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취조가 시작됐다.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오려 하는지, 연루자가 있는지, 있다면 누군지, 집요한 신문이 계속됐다. 사상범 의혹이 있어 조사 과정은 혹독했다. 전국 각지에서 연루자로 의심되는 이들도 삼엄한 취조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경성 숭삼동(명륜동 3가)에 사는 남정석은 “이 사건에 연락관계가 있다 하여 지난 1월16일 엄중한 가택수색을 당하고 신의주서로 잡혀갔는”데, 22일 무사히 방면돼 귀경했다고 한다.3 하지만 경찰의 의도와 달리 사건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런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구금 20일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단독범이었다.

치안 당국 상층부는 못 미더워했다. 사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1인 단독 사건으로 간주하기에는 피의자 신원이 너무 이채롭고 거물급이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사회주의운동의 한 씨앗이 발아할 때부터 거기에 참가한 고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당 고려부 비서, 연해주당 정치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그뿐인가. 문필 능력이 탁월해 이론가라는 지목을 받았다. 총독부는 정예 관리를 투입해 밑뿌리부터 재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그해 2월4일 채그리고리는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호송됐다. 밤 8시40분 경성역에 도착했을 때다. 역두에는 경찰 경계망을 피해 다수의 동료가 몰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잠시나마 보려는 의도였다. 웅성거리는 출영객들의 소란이 호송 중인 피고인에게 위안과 격려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30살의 채그리고리. 임경석 제공

1928년 2월4일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이송 중인 채그리고리(왼쪽). 임경석 제공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채그리고리는 예심을 받아야 했다. 예심이란 피고인의 공판 회부 여부를 심리하기 위해 도입한 일제강점기 형사소송법상 절차인데, 주로 사상범에게 적용된 악명 높은 제도였다. 이 제도 아래서 피고인의 인신을 무기한 구류할 수 있었다. 채그리고리는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계속됐다.

결국 ‘예심 종결서’가 1928년 5월28일자로 채택됐다. 총독부 예심판사는 공판에 회부해야 할 피고인의 ‘범죄행위’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1926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신철·정운해와 모임을 열고 조선의 적화를 위해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와 선전에 노력하기로 협의한 점. 둘째, 그해 10월부터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조선 내지의 사회주의자 마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 내부의 정세를 탐지한 점. 셋째,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다가 체포된 점이었다.4

채그리고리의 진술 전략이 일정한 효과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관되게 비밀결사에 가담한 혐의를 부인했다. 예심 종결서에 동료 이름이 몇몇 거론되지만, 단체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적 관계로 간주했다. 또 다른 진술 전략은 합법 운동론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신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는 합법 사상단체에 참여해 경찰 당국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운동하려 했노라고 주장했다. 재외국 조선인의 입장도 적극 내세웠다. 자신은 러시아 동포 3세로서 조선에 대한 향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국인데 일찍이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으므로, 이번 기회에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채그리고리는 이런 논리를 경찰, 검찰, 예심 취조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다. 공판 법정에서도 동일한 진술 전략을 택했다. 결국 채그리고리는 단독범으로 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을 피하진 못했으나 비밀결사의 존재와 그에 속한 동료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중형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

조선 사회주의 좌경화의 선도자
채그리고리는 비주류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다. 1926년 3월 결정서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이뤄진 뒤, 당외에 남아 있던 두 공산그룹이 독자 노선을 표방하면서 통합을 결의했다. 북풍파와 노동당(일명 국민의회파) 공산그룹이다. 이들은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베이징에 두었다. 채그리고리는 이 당외 통합그룹의 중앙위원회 멤버였다. 아마 책임비서였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좌경화를 선도했다. 1927년 초겨울, 북·노 통합그룹의 중앙간부들은 일련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국내외 운동 정세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였다. 국제적으로는 중국 국공 합작의 파탄, 코민테른 중국 정책의 좌선회, 중국 공산당 내 급진적인 취추바이(구추백) 노선 정립 등에 주목했다.

국내 운동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분열해 이른바 서상파와 엠엘파가 분립하게 된 것이다. 북·노 통합그룹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을 바로잡을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를 위해 베이징의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국내로 옮기기로 했다. 채그리고리를 비롯해 정운해, 신철, 마명 등이 국내로 입국하려 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신정책을 발표하여 노선 전환을 도모했다. 1928년 1월21일 경성청년회 명의로 ‘모든 수정파들의 기회주의적 연합전선을 공박함’이라는 긴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호응해 경북 상주청년동맹, 함남 영흥청년동맹, 경기도 안성청년회 등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서 급진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0년 4월19일 채그리고리가 사망했다. 경성역 맞은편 세브란스병원 제5호 입원실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사인은 폐병이었다. 3월29일 형기를 마치고 감옥 문을 나서던 때부터 그는 심하게 앓고 있었다. 자유를 잃은 지 2년2개월 남짓, 건강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유치장과 감옥에서 어떤 처우를 받았기에 유명을 달리할 만큼 심각한 건강 손상이 있었을까.

숨을 거두기 하루 전, 채그리고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상 연구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내일 오실 수 있는 분은 모두 모여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해 혁명사업을 도모했을 동지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밤새 병세가 급속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병실이 마치 감옥 같다는 느낌이 든다, 포근한 조선식 온돌방에 눕고 싶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유해를 연구재료로 쓰라”
러시아 연해주에는 아내와 함께 자녀 7남매가 있었다. 그중 맏딸은 20살 성년이었고, 막내아들은 아직 7살이라 했다. 고국에는 한 사람의 친척도 없었다. 채그리고리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준비했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신간회 본부가 장의위원회를 맡기로 했다.

4월22일 그의 영결식이 있는 날, 폭우가 쏟아졌다.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300명이 운집한 속에 영결식이 진행됐다. 일본 경찰은 채그리고리의 장례식이 무사히 치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약력을 소개하는 도중, 임석 경관은 발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집회 중지를 명령했다.

채그리고리의 유해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해부학 실습에 사용됐다. 의전 학생들의 학습 교재로 그의 인체 표본이 오래 활용됐다고 한다. 고인의 뜻이 제대로 실현됐다. 사후 1주기가 됐을 때 그의 동지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채로운 추도회를 열었다. 강철로 관을 만들어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로 했다. 병원 내에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몇백 년이라도 보존될 것을 생각하니 매우 기쁘다고, 제작에 참여한 동료 신철은 토로했다.

당시 사진이 남아 있다. 등신대(사람 크기)의 철제관이 세워졌고, 청년 7명이 이를 둘러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채그리고리와 비밀결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이라고 생각된다. 철제관 머리쪽에 혁명을 상징하는 별이 양각돼 있다.5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치.

2. 심훈, ‘동방의 애인(1)’,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3. ‘체포된 蔡某(채모)는 공산대학 교수’, <동아일보> 1928년 1월25일치.

4. ‘예심 종결서’, 경성지방법원, 쇼와 3년 5월28일.

5. ‘月餘(월여) 두고 鐵棺(철관) 제작, 동지 유골을 안치’, <조선일보> 1931년 4월19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