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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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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함 대신 친근함

광장에 모인 촛불들의 쉼터가 된 세종문화회관

웹툰 같은 대중적 이미지로 시민들에게 다가가
등록 2017-02-22 12:48 수정 2022-12-15 06:58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은 웹툰 같은 포스터 등을 활용해 편안하고 친근한 공간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박승화 기자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은 웹툰 같은 포스터 등을 활용해 편안하고 친근한 공간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박승화 기자

“그녀가 샀다고 의혹을 받은 그림 중 하나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 2008년 4월2일, 홍라희 관장은 검찰에 출두했다. 삼성 계열사들의 분식회계로 조성된 비자금으로 값비싼 미술품을 사들였다는 의혹과 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이경식 지음, <이건희 스토리-생애와 리더십>, 436쪽)

들어나 봤나, 행복한 눈물! 당시 ‘삼성 특검’이 비자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이 그림은 단숨에 포털 검색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뉴욕 출신인 그는 미국의 대중 만화를 예술 안으로 끌어들였다. 밝은 색채, 단순한 형태, 뚜렷한 윤곽선, 기계적인 인쇄로 생긴 점(dot) 등이 특징이다. 대량복제 시대의 기계적인 점은 작가의 개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장치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를 맞아 그는 “오늘날 예술은 우리 주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팝아티스트였다.

“영화·게임처럼 포스터 만들자”

그런 팝아트가 2017년 서울의 공연장 포스터 안으로 들어왔다. 현대적이고 날렵한 소규모 극장이 아니다. 내년이면 설립 40돌을 맞는 웅장한 규모의 서울 세종문화회관이라는 대형 공연장이다. ‘세종문화회관 2017~2018 세종 시즌’(이하 세종 시즌) 포스터를 만든 제작진은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근엄한 극장에 왜 ‘만화 이미지 포스터’를 쓸 생각을 했을까?

우선 ‘세종 시즌’ 포스터를 뜯어보자. 웹툰처럼 만든 패키지 안내 포스터.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붉은색 티켓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을 잡아끈다. 공연장의 주요 고객인 젊고 활기찬 여성이 주도하는 관극 문화를 발랄하게 포착한 장면이다. 메인 포스터 3장을 연결하면 예약부터 공연장 입장까지의 과정을 만화처럼 알기 쉽게 전달해준다.

팝아트적인 웹툰 형식은 패키지 안내 포스터 배포에 앞서 지난해 12월 온라인에서 진행한 시즌오프 기대 이벤트 ‘세종은 ○○○이다’의 사이트 디자인으로도 활용했다. 각각의 메인 포스터는 한 손에 티켓을 쥔 남자와 그의 품에 안겨 볼에 키스하는 여자의 뒷모습, 표를 바라보고 양팔을 들어 기뻐하며 활짝 웃는 남자, 남자의 눈을 가린 채 말을 건네는 여자의 모습이다.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받고 싶은 것을 형상화한 것. 붉은 색채로 화려함을 강조해 젊고 활기찬 공연장의 이미지를 심는다.

젊고 활기찬 공연장으로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디자인 작업에는 세종문화회관 홍보마케팅팀 원승락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유민영·김보선 디자이너와 조소희 객원디자이너가 참여했다. 원 디자이너는 “팝아트 거장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레트로 코믹스를 염두에 뒀어요”라고 콘셉트를 설명했다. 레트로 코믹스는 1960~1970년대 미국의 대중 만화를 가리킨다. 요즘 트렌디한 만화보다는 과거의 만화, 성인 취향의 만화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것. 너무 경박하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스타일이다.

“영화나 게임 같은 장르는 부담을 갖지 않지만, 예술 공연장은 나랑 관련 없는 곳, 내 소득 수준으로는 접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세종문화회관은 다른 공연장보다 관람료가 저렴할 뿐 아니라 할인도 많잖아요. 그럼에도 공간 자체가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는 편견이 늘 존재했어요. 이 포스터 디자인으로 기존 세종문화회관이 가졌던 근엄함, 올드함, 딱딱함을 버리고 편하고 쉽게 다가오시길 바랍니다.” 원 디자이너의 설명을 들으니 왜 이런 디자인이 나왔는지 분명해진다.

극장은 이미 광장에 다가갔다

포스터의 목적은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다. 먼저 눈길이 가야 그다음 내용이 들어온다. ‘세종 시즌’ 포스터는 그런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다. 공연계 안팎에서 “신선하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세종문화회관 홍보물이 추구했던 점잖은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령이 높은 이들은 여전히 어색해하고 세종문화회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젊은 층과 공연·디자인 전문지에서는 이 색다른 포스터에 좋은 평가를 내린다. 뮤지컬 전문 월간지 <더 뮤지컬>은 2월호에서 관련 기사를 냈고 디자인 전문지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포스터만 한정해서 보면, 그동안 클래식 공연 쪽은 그래픽 디자인의 관점에서 뒤처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세종 시즌’ 포스터는 세종문화회관의 ‘이미지 통일성’ 구축에도 기여했다. 예전처럼 포스터와 전단지, 전통적인 광고만으로 홍보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등 다양한 채널로 홍보해야 한다. 여기저기 활용되더라도 동일한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세종 시즌’ 포스터는 그러한 면에서 탁월하다.

세종문화회관이 디자인적으로만 친근해진 건 아니다. 극장은 이미 광장에 다가갔다. 지난해 말부터 세종문화회관 옆 광화문광장에서는 주말마다 촛불이 타오른다. 광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역사를 써내려갈 때, 극장은 광장의 시민에게 쉼터가 되었다. 대극장 현관과 엠(M)시어터 앞 계단, 소파가 마련된 서비스 플라자, 그리고 가장 긴요한 화장실이다. 극장은 광장과 통했다. 광장과 통한 극장은 이제 ‘세종 시즌’ 포스터로 근엄의 옷을 벗고 친근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손준현 <한겨레> 대중문화팀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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