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은 〈매거진t〉 기자
어느 날 친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우리의 정체’.
어딘가 낯익은 포즈의 캡처 사진 한 장과 함께 온 메일의 내용은 이러했다. “건어물녀란? 20대 여성 가운데 대량 출현 중이며 직장에서는 멀쩡하게 사람 노릇하는 조신한 아가씨지만 집에 오면 고딩 때 입던 무릎에 구멍 난 추리닝을 꺼내 입고 분수머리를 한 뒤 방을 정신없이 어지르고 맥주를 마시며 인터넷이나 만화책으로 밤을 지새우는 여자. 회식이나 미팅, 소개팅보다는 집에서 혼자 뒹구는 걸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연애 감정이 건어물처럼 메말라 연애도 못하는 여자들을 일컬음.”

△ <호타루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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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뒤 보고서라도 작성한 것처럼 구구절절 와닿았던 이 묘사는 알고 보니 지난해 방영된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의 주인공 아메미야 호타루(아야세 하루카)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 드라마는 건설회사의 인테리어 사업부 직원인 호타루에게 멋진 동료와의 사내 연애, 그리고 멋진 상사와의 뜻하지 않은 동거 생활이 동시에 찾아오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호타루는 오랜 세월 ‘건어물녀’로 살아온 탓에 모처럼 연애할 기회가 생겨 상대와 문자를 주고받게 되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주위에서 “의문문으로 보내야 답장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줘도 “예를 들면 ‘지금 몇 시에요?’라고 보내는 거죠?”라고 되묻는데다, 데이트를 하면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다가 ‘성인 여자’의 연애를 흉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보사노바예요”라는 거짓말이나 하는 식이다.
다 큰 여자가 그런 바보짓을 할 리 없다고? 호감 있는 상대가 있으면 몰래 훔쳐보기만 하다가 혹시 화난 일 있냐는 말을 듣고, 영화관에 가면 러브신이 나올 때마다 잠이 드는 내 주위에는 그보다 더한 건어물녀들이 오츠크해의 멸치떼처럼 모여 있다. 만나기 시작한 남자가 전화를 해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매일 밤 9시면 잔다고 말했던 Y양, 반면 좋아하는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통화할 때마다 토끼 밥을 주고 있다고 말하다가 진짜 토끼를 비만으로 키우고 만 S언니, 어쩌다 소개팅이 잡혀도 만나기 1시간 전이면 모든 게 귀찮아져 취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P양, 집에 바래다주던 애인이 손을 잡자 저도 모르게 “쑥스럽게 왜 이래요!”라고 뿌리친 뒤 돌아서서 벽에 머리 박았다던 K양은 모두 멀쩡하고 야무진 사회인들이다.
이렇듯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연애 대처 능력을 높이기엔 역시 TV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가장 가까운 참고서지만, 문제는 건어물녀에게 남들의 연애란 강 건너 불구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문화방송 <크크섬의 비밀>에서 공감 가는 건 사내 연애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로 표 그리기 못해서 구박받을 때의 공포요, SBS <일요일이 좋다>의 ‘패밀리가 떴다’에서 제일 지루한 순간은 ‘사랑해 게임’ 할 때인 것처럼 건어물녀의 TV에는 로맨스 분야만 흑백 처리돼 있다. 그래서 모처럼의 주말에도 만화책이 쌓여 있는 방 안을 뒹굴며 구겨진 트렁크에 목 늘어난 ‘비 더 레즈’ 티셔츠를 걸친 채 녹두장군 머리를 하고 교도소 배경의 미국 드라마 〈OZ〉에 열광하는 내 자신이 가끔은 진심으로 걱정될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마감이 연애보다 먼저 찾아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