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은 혁명가극 보여주고 남쪽은 비키니 차림 공연 보여주고… 남과 북의 문화공연 신경전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냉전시대 남북회담은 경쟁의 역사였다. 회담장만 뜨거웠겠는가? 회담장 밖에서도 뜨거운 경쟁이 벌어졌다. 문화 경쟁이다. 남쪽은 자본주의 문화를, 북쪽은 사회주의 문화를 앞세웠다. 문화경쟁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판문점에서 적십자회담을 할 때, 회담 지원 업무를 맡은 도우미도 경쟁의 대상이었을까. 남쪽은 정부 각 부처에서 미모의 여직원 6명을 뽑았고, 초미니 스커트를 입혔다. 반면 북쪽은 젊은 미남 군인들을 배치했다. 문화경쟁의 무대였던 공연예술 분야로 들어가보자.
회담지원 도우미도 경쟁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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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1일 저녁 평양 5·1체육관에서 연인원 10만여 명이 참여한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장철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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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공식 회담 대표단이 기자단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한 것은 1972년 8월30일 평양에서 열린 제1차 적십자회담이었다. 북한은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를 보여줬다. 북한의 혁명가극들은 일제시대 항일 무장투쟁을 다룬 것으로, 북쪽 체제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처음 접해보는 북한의 문화였기에 남쪽 대표단은, 그냥 봤다. 이런 일도 있었다.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남쪽 대표단원들에게 붉은 머플러를 하나씩 매주었다. 남쪽 대표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평양에서 서울로 보낸 사진을 보고 서울 상황실은 난리가 났다. 곧이어 긴급 전달사항이 남쪽 대표단에게 전해졌다. ‘붉은 머플러를 매는 것은 공산당 입당의 신호로 해석되니 빨리 머플러를 풀라’는 지시였다.
그럼 서울에선 어땠을까? 남쪽은 자본주의 공연 예술로 대응했다. 서울에서 개최된 2차 적십자회담에서 만찬 장소는 워커힐호텔이었다. 1부는 가야금 연주와 민속무용 등 무난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2부 행사였다. 인기가수 남진, 이미자, 김정구 등이 <목포의 눈물>이나 <두만강>을 부를 때는 괜찮았다. 그렇지만 펄시스터즈 등이 댄서들과 함께 등장해 당시 말로 ‘모던댄싱’이 이어지자, 북쪽 대표단이 술렁거렸다. 이어 비키니 차림의 댄서들이 요란스럽게 몸을 흔드는 본격적인 ‘워커힐쇼’가 시작됐다. 여성대표인 이청일은 고개를 숙였고, 북한 기자는 ‘제국주의자들이 버려놨다’고 인상을 썼다. 다음날 <조선중앙통신>은 “공연이 서방 스타일로 썩고 유해한 것이어서 예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남북한의 공연예술이 본격적으로 상호 교류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단 공연이 있었다. 남쪽은 9월21일 평양대극장에서, 북쪽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예술 공연을 했다. 남쪽 공연단에는 김정구·김희갑·하춘화를 비롯한 인기가수들이 포함됐다. <그리운 금강산>을 노래하자 평양 시민들은 큰 박수를 보냈고, <서울의 찬가>에는 침묵을 지켰다. 서울의 국립극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쪽 여성 사회자의 신파조 인사말이 시작되자, 장내에는 가벼운 실소가 퍼졌다. 무용극 <금강 선녀>의 무대 배경으로 사용된 금강산 풍경에 대해서는 ‘원색적인 색감으로 마치 이발소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노들강변>이나 <도라지 타령> 등 민요를 부를 때는 흥겹게 호응했다.
밤에는 주로 영화 관람을 했다. 4차 적십자회담이 열린 1972년 11월22일 타워호텔 영사실에서 남북 적십자 대표들은 극영화 <팔도강산>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1967년에 개봉한 영화로 1남6녀를 둔 노부부가 팔도에 흩어져 사는 아들딸의 초대를 받고 유람여행을 하는 내용이다. 박정희 시대 근대화의 성과를 선전하기 위한 계몽영화였다. 그런데 60년대에 만들어지다 보니, 대사 중에 ‘북괴’ ‘빨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왜 이런 영화를 보여주느냐. 난 이런 것 못 참는다.” 북쪽의 김태희 단장은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왔다.
회담 결렬로 이어진 ‘모란봉 경기장 사태’
1990년 9월 서울에서 열린 1차 총리 회담 때는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1989년 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에는 선정적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북쪽 기자는 “총리 동지 모시고 보기에 민망하구만”이라며 계면쩍어했다.
영화와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 4월 임동원 특보가 특사로 방북했을 때의 일화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쪽의 영화나 TV 사극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대해 “대단히 잘 만든 영화이고, 인간으로서 이념을 초월해서 통할 수 있음을 잘 묘사했다”고 호평했다. 반면 <춘향뎐>이란 영화에 대해서는 “서양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려 한 것 같은데, 아주 잘못됐다”고 혹평했다. 임동원 특보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비디오를 구해서 보았다고 한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중앙북스, 2008). 김 위원장의 취향을 고려해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DVD 세트와 영화 CD 등을 선물했다. <취화선> <말아톤> 〈YMCA 야구단〉을 비롯한 최신 영화와 <대장금> <겨울연가> 등 TV 드라마 150편 정도의 분량이었다.
문화경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북한의 집단체조다.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고, 공연·카드섹션·서커스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공연이다. 1985년 8월27일 9차 적십자회담 때의 일이다. 원래 학생소년궁전에서 ‘청소년 체조’를 관람하기로 했으나, 북쪽은 남쪽 대표단을 모란봉 경기장으로 안내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5만여 명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공연단과 카드섹션을 담당하는 5만여 명의 단원 그리고 관중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카드섹션에서 정치적 구호들이 나오자 북쪽은 수석대표 이종률을 비롯해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했다. 남쪽 대표단은 난감했다. 박수를 칠 수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당시 적십자회담 대표로 참여했던 이병웅씨는 당시의 난감함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바늘방석 같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수첩도 꺼내보고 넥타이도 한번 만져보고…. 15분쯤 지나자 남쪽 기자들이 하나둘 퇴장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대표들도 퇴장하기 시작했다.”(<평화의 기를 들고> 이병웅, 도서출판 늘품, 2006)
이것이 ‘모란봉 경기장 사태’다. 북쪽은 다음날 회담에서 “경기장에 모인 평양 시민들을 모욕했다”고 항의하며 남쪽의 사과를 요구했다. 남쪽은 “적십자회담에 정치선전을 개입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응했다. 회담은 결렬됐다. 다만 이를 계기로 양쪽은 사전 접촉을 통해 공연 내용을 협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두 번이나 일어나 박수를 치다
2005년께부터 북한은 <아리랑>이라는 집단체조를 관광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평양을 방문해 이 공연을 봤다. <아리랑>은 2008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규모의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으로 실려 있다.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아리랑>을 관람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아리랑 관람은 국내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북쪽은 남쪽 보수 여론을 고려해 공연 내용을 수정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을 칭송하는 서장을 생략하고 노동당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구호를 삭제했으며, 북한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총검술 장면은 태권도 시범으로 대체했다. 노 대통령은 공연을 보면서 두 번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회담 문화는 달라졌다. 대결과 경쟁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중시한다. 문화교류도 많아졌고,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굳이 공연·예술 분야에서 체제 우월성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왔다. 물론 체제의 차이가 남아 있다. 남쪽 내부에서는 여전히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대를 인정해야 대화가 이루어지듯이,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공존의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