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신금단과 아버지의 7분 만남에서 상시적 만남의 장소가 올 7월 완공되기까지, 이산가족 상봉 ‘단장의 기억’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단장.’(斷腸) 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말한다. 어떤 다른 말로 ‘이산’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과 분단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고통스런 유산은 바로 이산가족이다. 만나면 세 번 운다. 처음에는 그저 얼싸안고 울고, 두 번째는 체제의 차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울고, 세 번째는 다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슬퍼 운다.
그저 울고, 마음으로 울고, 현실에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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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지려나. 지난해 10월19일 오전 북쪽 금강산 외금강호텔에서 열린 제16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난 뒤 차량에 오른 북쪽 이산가족이 차창으로 내민 손을 남쪽 가족들이 부여잡고 있다. (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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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다시 만난 이산가족은 누구인가? 1964년 10월9일 오후 4시55분, 일본 도쿄의 조선회관.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 금단아.” 딸은 울음을 머금으며 “아바이” 그렇게 불렀다. 얼싸안았다. 14년 만이다. 1951년 1월 눈 내리던 함경도 이원에서 “사흘만 숨어 있겠다”며 집을 나설 때, 딸은 12살이었다. 이제 육상선수가 돼 도쿄올림픽에 참가했다. 아버지와 딸의 만남은 고작 7분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소련과 비동맹 국가들이 주축이 돼 열린 1963년 가네포 경기대회 출전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자격을 1년간 정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그 대회에서 신금단은 400m, 8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세계신기록으로. 금단은 금메달을 따고 남쪽에 살아 계실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말했고,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 위해 도쿄로 날아온 것이다.
그러나 북한 선수단은 올림픽을 거부하고 철수 결정을 내렸다. 북한 선수단이 일본을 떠나기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 부녀는 만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딸은 “어머니와 동생들은 다 잘 있어요”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는 “그래, 나도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딸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아요….” 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버지의 옷깃을 쓰다듬었고, 아버지 역시 딸의 두 손을 꼭 쥐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기차 시간이 되었다고 재촉하는 사람들에 떠밀려 딸은 차에 올랐고, 아버지는 넋을 잃은 듯 “금단아” 딸의 이름을 부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차에 오른 딸은 울부짖었고, “아바이 잘 가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멀어져갔다. 아버지는 니가타행 열차가 떠나는 우에노역으로 달려갔다.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다행히 초조히 역장실에서 기다리던 딸을 다시 한 번 안아볼 수 있었다. 기차는 떠났다. 그것이 이생에서 아버지와 딸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83년 12월27일 아버지 신문준씨는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상봉은 오빠와 동생이었다. 1971년 2월17일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 국제전화실.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던 북한 스피드스케이팅 대표선수 한필화가 초조하게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의 <아사히신문> 지사에는 오빠 한필성이 나와 있었다. 동생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고향 친구가 한필성에게 “막내 동생 필화가 틀림없다”고 전해주었다. “너는 장남이니 사흘만 피난 갔다 와라”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헤어졌는데, 21년이 흘렀다. 오빠는 떨리는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고, 동생은 “필성 오빠, 필성 오빠”를 외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곧바로 도쿄로 날아갔다. 그러나 오누이는 만날 수 없었다. 오빠와 동생은 겨우 2km 떨어진 호텔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남북한은 서로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이유로 상봉 장소를 두고 옥신각신했고, 결국 상봉은 무산됐다. 필화는 도쿄를 떠나는 비행기 트랩을 오르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네가 여기서 세뇌공작을 많이 받았구나”
그렇게 헤어진 오누이가 다시 만나는 데는 19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990년 3월 삿포로 동계아시아대회가 열렸고, 필화는 이제 선수가 아니라 임원이 돼 참석했다. 남북한 당국은 이 사연 많은 오누이의 상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동생은 “아버지는 오빠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슬피 울며 오빠의 품에 안겼다. 꿈같은 며칠을 보내고 헤어질 때, 오빠는 카세트테이프를 어머니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살아온 40년의 인생 역정을 담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온 국민을 눈물의 바다로 이끈 것은 1983년 한국방송의 이산가족 방송이었다. 이틀 정도 24시간 생방송으로 예정됐던 이 방송은 이후 136일 동안 진행됐다. 6월30일 방송이 시작되자, 전국 각지의 이산가족들이 한국방송 건물로 몰려들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종이에 적어 한국방송 건물의 사방 벽을 에워쌌다. 한바탕 통곡의 시간이 지나자, 모두의 눈길은 38선 이북의 북녘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가족들은 그곳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안고서 말이다. 결국 1984년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을 계기로 남북회담이 재개됐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1985년 추석을 기해 이산가족 교환방문이 이뤄지게 됐다.
그해 9월22일 서울과 평양. 만남의 기쁨이야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그날 서울에서 54살의 장남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는 팔순 노모의 귓가에 “어머니 맏아들 형석이가 왔어요” 크게 외쳤다. 처음에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노모의 눈에도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옆방에는 부녀가 만나고 있었다. 생후 2살도 안 돼 생이별한 중년의 딸이 아버지의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부녀는 부둥켜안고 서로 울기만 했다. 상봉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쥐고 음식을 떠먹여주고, 우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버지의 두 뺨에도 눈물은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기자들도 안내원도 음식을 나르는 호텔 종업원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남의 기쁨으로 한숨을 돌리면 가족의 모습에서 분단의 벽을 확인하게 된다. 1985년 9월21일 평양의 고려호텔 3층. 지학순 주교는 여동생을 만나고 있었다. 남쪽 기자가 “오빠가 남쪽의 유명한 천주교 주교가 된 줄 아느냐”고 묻자, 동생은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돌았다”고 쏘아붙였다. 주교는 착잡한 표정으로 누이에게 “네가 여기서 세뇌공작을 많이 받았구나” 그렇게 한마디 했다. 다음날 주교는 고려호텔 3층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미사를 집전했다. 기도문 강독을 하다가 주교는 눈물이 울컥 솟아 한동안 미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가족의 만남만큼이나 분단의 골은 그렇게 깊었다.
대북정책의 성적표는
마지막 울음이 제일 슬프다.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얼마나 기다렸던 만남인데, 다시 헤어져야 하다니. 또 15년이 흘러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인 8월15일 1차 상봉 행사 이후 2007년까지 16차례의 상봉 행사를 가졌다. 2005년 8·15부터는 화상 상봉을 시작했고, 상시적인 만남의 장소가 될 금강산 면회소가 오는 7월 완공 예정이다. 이제 이산가족 1세대들은 고령화하고 있다. 올해도 주름이 가득한 늙은 아들은 임진강 강가에서 이제는 돌아가셨을 부모님 제사를 지내고, 어딘가 포장마차 구석에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자식의 얼굴을 떠 올리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버지가 있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꼭 이북의 동생을 찾아보라는 유언을 남기며 이산의 노인들이 세상을 뜨고 있다.
희미한 잔상마저 흩뜨리는,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다. 대북정책, 어쩌고저쩌고 다 소용없다. 단장의 고통을 덜어주라. 대북정책의 성적표는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었는지, 그것으로 평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