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발레, 체조가 서커스와 결합된 퓨전… 인간의 놀이는 얼마나 즐거운 상상의 힘을 낳는가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 <네비아>
|
서커스판은 기분 좋은 잡탕이었다. 안개와 빛, 비극과 희극, 기계체조와 애크러뱃, 발레와 차력놀음, 공중제비, 코르크 마개들의 소나기와 눈다발…. 이 혼란스러운 요소들이 뒤섞인 서커스가 갈수록 몽롱한 느낌으로 눈에 감겨왔다. 무대 위에서는 사람들의 아코디언 합창과 광대의 주절거림, 애잔한 음악이 멈추질 않는다.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국내에 첫선을 보였던 캐나다의 아트서커스 <네비아>(7월9~20일)는 아늑한 축제판을 엿보는 느낌이었다. 일반 서커스의 묘기 대행진 대신, 연출가의 아련한 유년 추억 속으로 이끌려갔다. 스위스 출신 연출가 다니엘 핀지 파스카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다정했던 옛 친구와 연인, 고향 사람들을 회상하는 여러 조각의 에피소드에 곡예를 녹여넣어 초현실적 드라마를 엮었다. 불춤과 동물쇼 대신, <네비아>의 곡예는 원색의 명암이 교차하는 조명 이미지와 천과 줄을 이용한 우아한 애크러배틱 퍼포먼스와 설치작업 같은 소품들을 배치한다.
<네비아>는 기실 연극과 발레, 체조가 서커스와 결합된 퓨전이다. 그러나 그 퓨전은 단순한 장르의 형식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벗어난 상상력의 퓨전을 실현하는 데서 힘을 얻는다. 100개의 접시가 대나무 막대 꼭지에서 빙글빙글 도는 대나무 숲 속의 연인들이나 빨간 무대막의 푸줏간 선반에서 안마체조를 하는 여배우, 몸을 마구 꺾어 양동이 속에서 집게가 되어버린 차력사 등은 현실과 철저히 어긋나는 풍경을 구성한다. 십자형의 공중그네와 줄을 탄 배우들은 중력과 어긋나는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몸으로 구성한다. 1만2천여 개의 코르크 마개가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오징어 같은 것들이 휙휙 떠돌다니는 허공 위로 트램펄린 위의 배우들이 튀어오른다. 그 정제된 이미지의 힘이 장면장면을 수놓으면서, 인간의 놀이가 얼마나 즐거운 상상의 힘을 낳는지를 새삼 반추하게 한다. 세상의 질서를 뒤엎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는 축제판에서 변혁의 힘이 나온다는 러시아 문화이론가 바흐친의 말을 내내 생각했다. 이 서커스의 화자인 광대 곤잘로는 시종 차력사와 찧고 까불다가 막간에 관객에게 말한다. “무대에선 모든 것이 진짜처럼 보여야 하죠. 그러기 위해 우리는 거짓을 연구합니다.”
곤잘로의 말에 퍼뜩 먼저 보았던 국립발레단의 퓨전 발레 <오델로>(7월11~13일 서울 예술의전당)의 장면장면이 뇌리를 찔렀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앞에서 연극 연출자와 세 명의 현대발레 안무가들이 연극 대사와 발레의 몸말을 뒤섞는 이 모험은 <네비아>의 유연한 퓨전과 달리 옹이처럼 뻑뻑했다. 극의 줄거리를 대사로 잘 전달해야 한다는 소통의 압박, 춤으로 원래 연극적 메시지를 잘 표상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시종 시선을 안쓰럽게 내리눌렀다. 셰익스피어 원작대로 대본의 대사와 움직임에만 초점을 맞추면 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될 것이 뻔하다. 네 막의 장면을 구성하는 연극 배우와 춤꾼들은 찌르는 듯한 고성과 격렬한 몸동작으로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베니스 장군 오델로의 강박감과 자기분열, 둘을 이간하는 부하 이아고의 악마적 캐릭터를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아고는 캐릭터를 지극히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데 치중하고, 오델로는 절규하지만 무언가를 자꾸 설명하려고만 했다. 대본의 내용에 반기를 들거나, 인물 캐릭터를 색다른 반전으로 비약시키는 묘미를 느낄 수 없었다. 연출자는 물론이고 안무자들은 명작의 무게감에 가위눌린 기색을 내비쳤다. 배우들은 목청을 다해 외치고 춤꾼들도 비명에 가깝게 절규하며 미친 듯 춤추었지만, 극의 윤곽을 불편하게 주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시종 벗어날 수 없었다. ‘오버’해서 나오는 괴성과 몸짓들은 오히려 춤 자체가 빚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춤평론가 허명진씨는 “사실적 연극 장면과 원전에 충실한 대사들은 이해를 돕는다는 명분과 달리 오히려 소통의 강박 속에서 스스로 갇혀버렸다”고 했다.
다시 <네비아>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이 서커스의 경쾌하면서도 철학적인 퓨전은 축제와 안개바다를 보며 자랐던 연출가의 어릴 적 추억에서 전적으로 추출된 것이기에 가능했다. 연출가는 그 체험을 한자리에 모은 뒤 다시 발효시켜 현실의 규칙과 동떨어진 구도로 움직이면서 연출의 에너지를 새로 창조해냈다.
퓨전은 여전한 국내 공연예술계의 화두다. 그림과 연극, 연극과 춤을 섞는 장르 간 교배는 일상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퓨전 무대가 진정 관객에게 신명과 감동을 안겨주려면 이질적인 것들이 현실과 거꾸로 가며 빚는 일탈의 즐거움을 함께 느끼는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되풀이되는 연출, 안무, 연기의 강박관념을 뒤집는데서 나온다. 러시아 비평가 바흐친의 말처럼 축제는 끊임없이 옮겨가고 뒤바뀌며 죽음과 부활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변혁의 힘을 얻는 법이다. 옷이 답답하다면 훌렁 벗어야 한다.